"13만 원이 없어서 중국산 약 먹다..." 낙태죄 폐지 1년, 위기의 여성들

입력
2021.11.04 10:30
'죄'만 사라졌을 뿐 후속입법 '공백'
약물도 수술도 불투명한 체계
"국회·정부 적극적 대책 강구해야"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낙태를 처벌토록 한 형법 조항은 올해 1월 1일부터 효력을 상실했다. 낙태죄가 등장한 1953년부터 논쟁을 겪다 2012년, 2019년 두 차례 헌재에 소환된 끝에 마침내 소멸한 이후 첫해가 끝나간다. 그간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유산유도제를 보내준다는 해외 여성단체가 있었어요. 후원금 차원으로 13만 원을 내면 되는데, 그 돈이 없었죠. 그때 한 친구가 중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비슷한 중국산 약을 사 왔어요. 3만 원이라길래 일단 샀는데 복용법도 모르고 사용서도 없어서 그냥 먹었더니 한 달 넘게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결국 실패해서 병원 갔죠."(20대 후반 A씨)

"인맥을 총동원해서 수술 가능한 병원을 찾아야 했어요. 울산 사는데 부산까지 갔어요. 준비한 돈은 30만 원인데 그 병원은 80만 원을 현금으로 요구했어요. 어차피 선택권이 없으니까…"(20대 초반 B씨)

"유산유도제라는 게 있다는 건 알았지만 구하기 어렵고 해외에서 구해오느라 시간이 좀 걸린다 해서 병원으로 갔어요. 돈이 꽤 들었어요. 카드 한도가 살아날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현금 서비스 받아서 갔어요."(30대 후반 C씨)

이들의 임신중지 시점은 A씨가 2019년, B씨는 2010년, 그리고 C씨는 올해다. 각각 헌법불합치 결정이 난 해, 임신중지 의료기관 고발 운동이 펼쳐졌던 해, 낙태죄가 소멸한 해였다. 변한 건 없는 셈이다.

임신중지, 왜 양지로 나오지 못하나

4일 여성가족부와 국회 등에 따르면 낙태죄가 사라진 뒤 대체입법이 없는 공백상태가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임신중지의 절차, 시술, 비용 등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없다는 얘기다. 처벌은 안 한다지만, 그렇다고 합법적 근거와 가이드라인이 있는 건 또 아니다.

그러니 임신중지는 여전히 음성적으로 이뤄진다. 무자격자가, 성분이 불분명한 약을, 흔적 없이 깨끗하게 해준다라고 광고하는, 온라인 판매가 버젓이 이뤄진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2015년 12건이었던 낙태약 불법 거래는 2019년 2,365건으로 폭증했다.


비용에 대한 규정도 없으니 수술비 또한 '부르는 게 값'이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이 A, B, C씨를 포함해 임신중지 경험이 있는 7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경험자 68명이 지불한 금액은 30만 원 미만부터 300만 원 이상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국회에서 잠든 개정안만 7개

후속입법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형법이나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정부안이 발의되어 있고,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 발의안 등까지 합치면 모두 7건이 있다. 몇 주차까지 임신중단을 허용할지, 의사 진료 거부권은 보장해야 하는지, 세부적 내용이 달라 법안심사소위에서 토론이 이뤄져야 하지만, 번번이 다른 법안에 밀린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관계자는 "절차상 자동으로 소위까지는 갔어도 구체적인 허용 범위를 정하는 개정안은 모두 소위 문턱을 넘지 못했다"고 전했다.

여성계에선 국회와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를 지적한다. 정확한 정보 부족, 불투명한 의료전달체계 등이 건강권 위협과 비용 부담으로 이어지는데, 여전히 고질적 찬반대립 구도에 빠져 눈치만 보고 있다는 비판이다. 나영 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낙태를 어디까지 허용할 거냐의 문제로 보는 건 과거와 다를 바 없다"며 "처벌과 허용이란 과거의 프레임에 갇혀 있을 게 아니라 여성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를 중심으로 대체 법안들을 빨리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맹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