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김정은'의 길

입력
2021.11.03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북한에서 수령(首領)은 김일성 주석에게만 허락된 신성 불가침한 칭호였다. 그는 1960년대부터 주체사상과 우상화 작업을 통해 수령 중심의 유일 지도 체제를 구축, 거대한 가족 국가의 ‘영원한 어버이 수령’이 됐다. 사실상 신으로 숭배된 터라 아들 김정일 국방위원장조차 살아 있을 땐 수령이란 호칭을 쓸 수 없었다. 지금도 북한 매체에서 ‘선대 수령님들’이란 표현은 보여도 ‘김정은 수령’이란 표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수령이란 용어의 상징성은 크다.

□ 그래서 ‘수령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선언은 다소 의외였고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는 2019년 3월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게 된다, 수령은 인간이고 동지이다, 수령에게 인간적으로 동지적으로 매혹될 때 절대적인 충실성이 우러나온다”고 강조했다. 일부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선 스위스에서 공부한 젊은 지도자가 선대와는 달리 북한을 ‘정상 국가의 길’로 이끌 것이란 기대도 나왔다.

□ 그런데 최근 김정은을 직접 ‘위대한 수령’이나 ‘걸출한 수령’으로 지칭하는 노동신문 글이 잦아지고 있다. 당 기관지의 충정일 수도 있지만 이미 지난 1월 8차 당 대회에서 수령으로 등극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적어도 김일성 반열에 오를 만큼 정치적 위상을 확고히 한 건 분명해 보인다. 당 대회장 무대 배경의 김일성-김정일 사진을 없애고, 내부적으로 ‘김정은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눈에 띈다.

□ 집권 10년 차인 김 위원장이 내부 통제를 강화하며 수령으로 신격화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아무리 북한 주민이라 해도 21세기에 수령 신격화가 통할 리 없다. 우두머리임을 강조하는 수령이란 용어 자체도 전근대적이다. 사회주의 정당에서 서열 1위를 총비서나 총서기로 '겸손하게' 부르는 건 인민을 위한 봉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하노이 북미 회담 무산과 코로나19 이후 북한이 점점 폐쇄와 퇴행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론 정권을 보존하는 것도 힘들다. “수령은 인민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민의 행복을 위해 헌신하는 영도자다.” 김 위원장은 스스로 한 말을 지키는 길부터 숙고해야 한다.

박일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