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글맞은 첫사랑의 기억

입력
2021.10.2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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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에서 어린 시절 첫사랑에 대한 집착이 너무 자주 등장한다는 이상 징후를 발견하게 된 건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다.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더라', 아니면 최소한 '어린 시절의 인연이더라'라는 식의 설정은 너무나 많은 드라마에서 등장한다. 현재 방영 중인 '홍천기', '연모', '원더우먼'뿐 아니라 최근 종영한 '갯마을 차차차'와 '너는 나의 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외에도 사례는 넘쳐난다.

첫사랑에 대한 운명론적 가치관은 사실 보편적 정서라고 하기엔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게다가 이러한 '운명적 첫사랑 서사'에서 드러나는 첫사랑에 대한 집착은 어딘가 이상하고 수상하다.

사랑이란 두 사람 사이의 복잡한 차이와 갈등을 함께 극복하고 어려움들에 대처하면서 형성해가면서 그들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은 자아의 성장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운명적 첫사랑 서사에서는 상대가 이미 어린 시절 결정된 운명의 상대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의 미래가 보장된다.

새로운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난관도 의미도 사라지고, 우리의 자아가 성장할 필요도 사랑에 대해 배우고 공부할 필요도 없이 그저 운명의 상대만 찾으면 되는 것이 운명적 첫사랑 서사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사랑의 지속'을 구분하며, 후자에는 배움과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서사들은 시청자를 사랑에 관해서는 성장을 멈춘 존재로 퇴행시켜 버리는 듯하다.

예전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일편단심 순정파 드라마 주인공들이 많았다. 그런데 10여 년 전부터는 대략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관계가 운명으로 설정되고, 현실 속에서 잊고 살다가 성인이 되어 만난 상대가 그 운명이더라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경우 살면서 이전에 사랑했던 이들과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부정된다. 결국 이는 그동안의 자신의 삶, 나아가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자기 부정이 바로 운명론의 결과물이다. 설사 나중에 헤어지게 된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은 미래의 방향을 향해 자신들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삶의 과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운명적 첫사랑과의 재회라는 과거로의 회귀는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과 미래로의 모든 과정을 삭제해 버린다.

어쩌면 직장도 없고, 집도 없고, 경력단절 없이는 아이도 낳을 수 없고, 성공과 승리만이 중요한 현실에서 '자아의 성장' 따위는 사치라고,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은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서, 지금을 견뎌내는 많은 이들의 집단적 무의식이 비틀어진 방식으로 첫사랑에 대한 운명론적 집착의 반복으로 반영되며 드라마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드라마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없을 때 돌아갈 곳은 과거뿐이고, 그리하여 과거의 낭만화된 영광만이 비참한 현실의 마취제가 되는 사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드라마들 속 첫사랑에 대한 집착, 우리의 진짜 삶을 지워버리고 현실의 좌절을 가리는 이 집착이 그저 순수하고 아련한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하기에 어딘가 수상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지영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BTS예술혁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