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동산 개발로 잔뼈가 굵은 이모씨는 2018년 수도권 한 도심에 상가를 올리는 '시행업 게임'에 참가했다. 깔린 판돈은 700억 원 규모. 최종 미션까지 성공 시 손에 쥐는 상금은 판돈의 10% 정도였다. 대신 개발자금 조달은 참여자 몫이었다. 자기 돈이든, 대출이든, 사채를 쓰든 영혼까지 끌어모아야 했다.
돈을 딸 확률보다 잃을 가능성이 10배, 아니 100배는 컸다. 땅 매입부터, 인허가, 분양까지 불확실성투성이고 중간에 어느 하나라도 틀어지면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임. 영화 ‘타짜’의 대사처럼 쫄리면 죽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씨는 도심 입지와 자신의 안목을 믿었다. 작은 건물 4개를 통째로 허물고 큼지막한 메디컬 건물을 올리겠다는 구상을 구체화했다. 병원에 주차할 공간이 없어 불편하다는 주민들의 니즈를 파고 들었다.
역시나 암초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땅 매입 때 "못 나간다"며 버티는 상가 임차인과 협상하느라 진땀을 뺐고, 기존 건물 철거 전 다른 지역에서 붕괴사고가 일어나 지자체의 인허가가 까다로워졌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난관을 통과한 이씨는 3년 만에 준공과 분양을 마쳤다. 총 투입 자금은 550억 원, 매출액은 약 700억 원이다. 차액 중 절반을 세금으로 내고도 순수익으로 75억 원을 챙겼다. "평생 하나만 성공해도 충분히 먹고산다"는 시행업계 속설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경기 성남시 대장동 개발사업에서 화천대유자산관리가 자본금의 수천 배에 이르는 개발이익을 챙긴 게 알려지며 시행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사업이 잘되면 상상도 못할 '돈잔치'를 벌일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시행사는 부동산 개발업체, 흔히 디벨로퍼(Developer)라고 한다. 디벨로퍼는 부동산 상품 기획부터 자금 조달, 인허가, 분양까지 사업의 전 과정을 책임진다.
시행사의 개발사업은 크게 △토지 매입 △인허가 △분양의 3단계로 이뤄진다.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변수를 뚫고 사업을 마치면 막대한 이익이 쏟아진다. 반면 단 하나라도 틀어지면 실패로 직결돼 흔히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한다. 하이 리스크를 없애기 위해 종종 부적절한 행위가 수반돼 대장동 개발이나 부산 엘씨티 사업처럼 후폭풍이 크게 일기도 한다. '성공하면 디벨로퍼, 실패하면 사기꾼'의 경계를 오가는 시행사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1일 한국일보 인터뷰에 응한 시행사 관계자들에 따르면 통상 아파트를 지어 100% 분양까지 마치면 총 매출의 10%를 수익금으로 가져간다. 매출이 2,000억 원이면 시행사 순이익은 200억 원인 셈이다. A시행사 대표는 "토지만 갖고 있으면 평생 거지처럼 살아도 언젠가 한번 기회는 온다"며 "한 번만 터져도 100억~200억 원은 기본이니 일단 발을 들이면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운 좋게 사업을 잘 끝내 '돈벼락'을 맞으면 평생을 수익금으로 먹고살 수 있다. 그런데 일단 성공을 맛보면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계속 판을 벌린다. B시행사 대표는 "서울 도심에서 대형 빌딩으로 엄청난 수익을 낸 사람이 있는데, 거기서 만족을 못하고 관광지에 리조트 사업을 펼치다 벌어들인 돈을 다 까먹었다"고 전했다.
이런 사례를 두고 업계에서는 '9대 1' 법칙을 얘기한다. 아홉 번을 성공해도 한 번에 망하는 사업이란 의미다. C시행사 임원은 "한 번 성공에 200억 원씩, 총 아홉 번에 걸쳐 1,800억 원을 벌었어도 다음 사업에서 2,000억 원이 손해나 바로 망하는 게 이 바닥 생리"라고 설명했다.
토지 매입은 첫 단추를 꿰는 아주 중요한 단계다. 입지와 수익성이 좋은 땅을 점 찍고 저렴한 가격에 확보해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장동 개발처럼 공공기관이 토지를 감정가에 수용해주면 차려 놓은 밥상을 먹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민간 사업자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토지주는 '내 땅이 가장 좋은 땅'이라는 인식이 강해 보상금 협상 자체가 어렵다. 토지주들 사이에서 "누구는 얼마를 받았다"고 소문이 나면 골치 아파진다. 도로에 붙은 땅을 3.3㎡당(약 1평) 100만 원에 계약했는데 자투리 땅을 500만 원에 사야 할 수도 있다. 매입 과정이 길어져 '알박기'를 하는 업자가 나와도 곤란해진다.
그래서 시행사 관계자들은 "고도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사람 대 사람이 하는 일이라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따르는 통장, 이장, 노인회장 등을 '깐부'(같은 편)로 만드는 게 핵심 전략이다. D시행사 임원은 "영향력 있는 토지주들을 영업사원으로 활용해 일정액을 수수료로 주기도 한다"며 "평생 농사만 지었던 60, 70대들은 영업사원으로 영입한 통장이 '계약하자'고 하면 따른다"고 말했다.
인간적 신뢰를 쌓기 위해 온갖 경조사를 따라다니며 직접 챙기기도 한다. E시행사 대표는 "마을 잔치가 있으면 잔치 음식 등을 해주면서 신뢰를 쌓는다"고 했다. 이들이 토지주와 형님, 동생이 되는 데는 최소 6개월, 길게는 2, 3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행사와 지자체 공무원의 부적절한 관계는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현재는 부적절한 유착 관계가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과거에는 꼭 거쳐야 하는 단계로 여겨졌다. 인허가는 거쳐야 할 단계가 너무나 많은데, 인허가권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불확실성을 대폭 낮출 수 있다. 전직 공무원 F씨는 "시청에서 건축 관련 부서만 주택과, 도시정비과, 환경과, 토목과, 건축과, 도시계획과, 상하수도과 등 족히 10개는 된다"며 "사업계획서를 내고 일일이 허가를 받으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만약 다른 과에서 승인을 했어도 도시정비과에서 "아파트 높이가 문제가 있다"고 반려하면 사업을 못하게 되는 구조다. G시행사 임원은 "복잡한 인허가 단계를 볼 때 외국 회사들은 우리나라에서 절대 시행을 못한다"고 말했다.
지자체 인허가권은 수도권 외곽과 지방으로 갈수록 세다고 한다. 업계에 정통한 금융권 출신 H씨는 "나 때만 해도 지방은 인허가에 '기름칠'(로비)이 가장 많이 필요했다"며 "거래 단위가 크면 지자체장까지 가야 했다"고 귀띔했다.
I시행사 임원은 "2000년대 후반까지는 매일 유흥주점을 가고, 주말에는 골프 치고 그랬다"면서 "요즘은 거의 없어졌다고 하지만 아직 뒷돈을 주는 데는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토지 매입이 밥상을 차리는 테이블 세터라면, 인허가는 찬스를 해결하는 4번 타자다. 분양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사업의 마지막을 책임질 마무리 투수다. 건물까지 올린 상태에서 분양에 실패하면 부채에 깔려 죽는다고 한다. J시행사 임원은 "수지 분석표 안에 있는 수익구조는 페이퍼 머니일 뿐"이라며 "현실에서 돈이 되려면 100% 분양이 돼야 하는데, 분양이 안 되면 이건 수익이 아니라 아주 큰 마이너스"라고 설명했다.
분양 리스크는 잠재고객이 얼마나 많은가로 판단된다. 잠재고객은 신규 이주 수요자와 기존 노후 지역의 이주 수요자로 구분한다. 대장동에 '판교'가 붙는 것처럼 입지 프리미엄이 있다면 '완판'은 따 놓은 당상이다.
시행사의 적정 수익 기준은 없지만 업계에서는 '10%의 법칙'이 통용된다. 사업 구상 때 최소한 10% 수익을 보고 하지 않으면 금융기관에서 사업 자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수익이 기대치를 웃돌 때는 주변의 타깃이 되기 십상이다. 누가 봐도 추진하기 어려운 사업이라고 봤는데, 그게 성공하면 수사 기관에 찌른다는 것이다. E시행사 대표는 "검찰에 불려가 조사받고, 세무서가 탈세로 걸면 아무리 돈을 벌어도 상처뿐인 영광으로 끝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