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광주행을 서두르고 있다.
전두환 옹호 발언에 이어 개 사과 사진 파문까지 거센 역풍에 지지율마저 휘청거리자 하루라도 빨리 광주에 가서 사과하며 본인의 잘못을 만회해 보겠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마음만 급한 발걸음이 성난 민심을 얼마나 가라앉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장 광주에선 "광주를 이용하지 말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제대로 격식을 갖춰 진정성 있는 사과부터 하고 내려오라는 거다. 그렇지 않고선 또 한번 민심을 기만했다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란 지적이다.
윤 전 총장 측은 전두환 옹호 발언 다음 날 열린 20일 토론회에서 사과 대신 "경선이 끝나면 광주로 달려가서, 제가 과거에 했던 것 이상으로 따뜻하게 보듬겠다"는 시혜성 위로 계획을 알리며 호남 방문을 공언했다. 이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21일엔 사과 대신 유감을 표명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TV토론 일정이 끝나는 대로 바로 호남을 방문할 생각"이라고 일정을 당겼다. 본경선이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직격탄을 피할 수 없을 거란 위기감에서 나온 조급함이었다.
윤 전 총장 캠프는 31일 열리는 서울인천경기지역 토론회를 마친 다음 날인 11월 1일 또는 3일을 디데이로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 전 총장은 대선 출마 공식화 이후 7월에 찾았던 국립 5·18 민주묘지를 다시 방문할 것으로 전해졌다. 윤 전 총장 캠프 대외협력특보인 호남 출신의 김경진 전 의원은 "토론회 끝나자마자 광주 시민, 호남 국민들께 사과를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윤 전 총장의 사과는 입을 떼기 전부터 진정성의 의심을 사고 있다.
당장 전두환 옹호 발언을 두고 마지못한 늑장 사과로 넘어간 것도 모자라, 개 사과 사진에 대해선 "소소한 문제"(김경진 대외협력특보), "지엽적"(윤희석 공보특보)이라고 회피하며 납득할 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서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겠다면서도, 사과의 주제마저 본인들이 제한하는 적반하장 행태에 반성의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당장 광주에서부터 반발이 터져 나왔다. 윤 전 총장의 정치쇼 무대로 광주를 활용하지 말라는 일침이다.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은 25일 국회를 찾아 공개 경고를 했다.
이 시장은 기자회견에서 "5·18 원흉 전두환을 찬양하는 것도 모자라, 개 사과 사진으로 또 한번 광주 시민을 우롱하고 짓밟은 윤석열 후보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광주를 방문하겠다는 것인지 광주 시민은 이해할 수 없다"며 "광주를 정치쇼 무대로 내어줄 생각이 전혀 없다"고 윤 전 총장의 광주행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진정성 있는 사과 행보를 광주 방문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했다.
이 시장은 "반성 없는 광주 방문은 오월 가족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분노케 할 뿐"이라며, "윤 후보가 당장 해야 할 일은 오월 광주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광주 시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진정성 있는 행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후에 광주를 방문해 오월영령들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한다면 광주 시민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당내 경쟁주자인 홍준표 의원 캠프에서는 윤 전 총장의 광주행에 대해 "명백한 지역 갈라치기이자 여론 호도"라고 비판하며 "진짜 사과할 마음이 있다면 광주 방문을 취소하라"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윤 전 총장이 분노한 광주 시민들의 뭇매를 맞는 모습에서 '진보에 탄압받는 제1야당 대선 후보' 이미지를 연출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노리고 있다고 꼬집으면서다. 이 같은 의심마저 나오는 배경에는 역시 윤 전 총장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결여돼 있다는 지적이 깔려 있다.
홍 의원 캠프의 여명 대변인은 "윤 후보는 '전두환 (옹호) 발언' 직후 쏟아진 국민과 언론의 지탄에도 본인 발언의 정당성을 견지할 뿐 바로 사과에 나서지 않았다"라며 "분노한 여론에 '개 사과' 논란까지 일으키며 억지 사과만 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여 대변인은 "그런 윤 후보가 이제는 광주를 찾아가겠다는 의도가 무엇이겠는가"라며 "5·18 묘역에서 분노한 광주 시민들의 뭇매를 받고, 영남 지역민들과 보수우파를 향해 '진보에 탄압받는 제1야당 대선후보' 이미지를 연출하려는 것 아니겠는가. 명백한 지역 갈라치기이자 여론 호도"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1991년 한국외대를 방문해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학생들에게 밀가루 테러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과격·폭력 운동권'으로 여론을 반전시킨 정원식 총리 사건이 연상된다"고 꼬집었다.
이어 "윤 후보는 다시 국민과 당원, 그리고 호남에 진심 어린 사과에 나서라"라며 "그 이전에는 호남에 발을 붙이지 않는 것이 예의이자 진정한 사죄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방송인 김어준씨도 윤 전 총장의 광주행을 두고 "일부러 계란 맞으러 가는 것 아니냐"며 선거 전략이라는 의심을 숨기지 않았다.
김씨는 본인이 진행하는 T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계란 던져 주면 오히려 (윤 전 총장은) 감사하다고 하는 거 아니냐. 광주 시민들이 일부러 계란을 던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정치에서는 그런 사건도 일부러 만들어 낸다"며 국민의힘 대선후보 결정 투표가 11월 1~4일 진행되는 만큼 윤 전 총장이 막판 보수층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계란 맞는 봉변'을 원하는지 모른다며 '음모론'에 불을 지폈다.
이에 대해 출연자로 나온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내 마음을 진솔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사과를 하겠다는 의미로 가는 것"이라며 "후보이기 때문에 경찰이 잘 방어를 해서 그런 장면이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고 또 그걸 노리고 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적극 해명했다. 이어 "오히려 '봉변당했다'라면 안 좋은 뉴스만 만드는 것"이라며 보수층 결집을 노리고 일부러 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윤 전 총장 측도 일회성 방문으로 호남 민심을 수습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있다.
김경진 전 의원은 "수습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혼내면 혼내시는 대로 저희가 혼이 나야 하고 윤석열의 생각과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다. 광주 5·18정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부분을 거듭 말씀드리려 한다"고 했다. 조해진 의원도 "험한 일을 당하더라도 본인 발언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해도 가려고 한다. 안 가면 오히려 지도자로서 자질 부족"이라고 했다.
일부에선 윤 전 총장이 김종인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무릎 사과'를 벤치마킹 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두 사람은 전두환 발언에 이어 개 사과 사진 파문까지 불거졌던 22일 배석자 없이 만찬 회동을 하는 등 스킨십을 늘려가고 있다. 일주일에 최소 2회 이상 전화 통화를 하며 정치적 조언을 얻고 있다는 게 윤 전 총장 캠프 측의 설명이다.
때문에 이번 광주행도 김 전 위원장의 코치를 받고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해 8월 김종인 전 위원장은 보수 정당 대표로는 처음으로 광주 5·18 민주 묘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김 전 위원장은 지난해 11월에 이어 3월에도 광주를 잇따라 찾아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5·18 단체들과 간담회를 가지며 호남 민심 구애에 나섰다.
호남 끌어안기에 공을 들였던 국민의힘. 보수정당의 외연 확장이라는 정치적 노림수가 깔려 있더라도 김 전 위원장의 '무릎 사과'는 5·18 정신 계승을 부정하던 일부 극우 세력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광주 민주화 운동이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시발점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다.
다만 김 전 위원장이 최근 인터뷰에서 윤 전 총장의 전두환 옹호 발언 논란에 대해 "실수를 인정하고 사죄했으면 된 것"이라고 두둔하거나, '개 사과 사진' 파문에 대해 "대선에 크게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조기 진화에 나서며 사태를 어물쩍 넘기려는 태도는 '무릎 사과'의 진정성을 퇴색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