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의 89년 삶은 영광과 오욕이 교차한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현대사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12ㆍ12 군사반란 주역으로 권력의 정점까지 올랐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벽을 넘지 못해 늘 ‘2인자’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재임 기간 북방외교 등 나름의 치적도 남겼다. 그러나 군사쿠데타와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고, 각종 병마에 시달리는 등 노년은 불우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씨와 어머니 김태향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밑으로는 동생 노재우씨가 있다.
어머니가 노 전 대통령을 임신했을 때 구렁이가 몸을 휘감는 태몽을 꿨다고 한다. 할아버지(노영수)는 이 구렁이를 용(龍)이라 여겨 태아 이름을 태룡(泰龍)으로 지으려 했지만, 일제강점기 시선을 끌까 두려워 ‘어리석을 우(遇)’ 자를 넣어 ‘태우’라고 작명했다.
1939년 아버지가 동생의 중학교 졸업식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일찍 사망한 탓에 노 전 대통령의 유년은 궁핍했다. 그해 대구 공산소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맨발로 등교한 적도 많았다.
그는 1946년 2월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립공업학교 전기과에 입학했다. 대구공업학교 출신인 전 전 대통령과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지만, 재학 당시엔 서로 모르고 지냈다. 나중에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재회한 두 사람은 그제야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이가 더 돈독해졌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대구공업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48년 경북중학교(현 경북고) 4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5학년 때 성적은 218명 중 68등으로 비교적 상위권에 속했으나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장래희망이던 의사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돼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들어갔고, 이등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헌병학교 9기를 우등으로 졸업해 교수부로 발령받았는데, 그곳에서 5세 위 김용희 소령(교수부장)을 만나 우정을 쌓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51년 10월 김 소령의 추천으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육사에 입학한다. 생도 때는 럭비부를 창단해 연승을 거두는 등 운동에도 소질을 보였다.
1955년 육사 11기로 임관한 노 전 대통령은 이듬해 육군 5사단 소대장(소위) 발령을 받아 사단장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처음 대면했다. 그 시절 친구 김복동 중위의 대구 집에 자주 들락거리다 그의 누이 김옥숙을 보고 반해 청혼했고, 1959년 5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같은 해 노 전 대통령은 먼저 진급한 전 전 대통령과 미국 유학길에 올라 6개월간 함께 생활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 귀국 후에는 군 최대 파벌 ‘하나회’의 출발점이 된 육사 11기생 친목 모임 북극성회를 조직했다. 1961년 5ㆍ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군 대위 신분으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후배 장교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지지하는 ‘카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그는 이후 승승장구했다. 중령으로 진급한 1967년 베트남전쟁에 맹호사단 대대장으로 참전했을 때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74년 1월 마침내 준장으로 진급해 별을 달았고, 1976년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로 임명되며 청와대에도 입성했다. 소장으로 진급한 1978년에는 사단장으로 전출된 전 전 대통령을 대신해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됐다.
1979년 10ㆍ26 사태가 터지자 노태우ㆍ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新)군부는 차근차근 군을 장악해 갔다. 상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기 위해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명령도 없이 그는 병력을 출동시켰다.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군사반란 모의와 실행에 적극 참여했다.
1980년 5월 신군부가 국가 권력을 완전히 손아귀에 쥐면서 노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에 이어 사실상 2인자로 군림했다. 불과 1년 남짓한 기간 중장, 대장으로 연거푸 진급했고 1981년 7월 군복을 벗었다. 다만 이 즈음부터 굳건했던 노태우ㆍ전두환의 관계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노 전 대통령은 당(민주정의당)과 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2년 체육부ㆍ내무부 장관을 잇따라 맡았다. 서울올림픽 유치에도 깊이 관여해 1984년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되는 등 스포츠 외교에 앞장섰다.
그는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당 전국구(비례대표)로 당선된 후전 전 대통령에 의해 대표최고위원에 임명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노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전 전 대통령의 호헌 조치에 맞서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ㆍ29선언을 관철시켰다. 대선 과정에서는 “나,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는 표어를 통해 ‘보통사람’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야권 단일화 실패를 발판 삼아 36%의 낮은 득표율에도 대통령에 당선된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 1년 차인 1988년 7월 7일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북방외교에 시동을 건다. 분단 후 남북화해 무드가 싹 튼 결정적 계기였다. 같은 해 9월 열린 서울올림픽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 상징이 됐고, 1990년 10월 선포한 ‘범죄와의 전쟁’은 이후 민생치안 확립의 대명사로 통했다.
1993년 2월 권좌에서 내려온 그에게는 혹독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흘러나온 비자금설에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노 전 대통령은 결국 대국민 담화를 자청해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원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 원이 남았다”고 실토했다. 그는 1995년 포괄적 뇌물죄로 전격 구속됐다. 때맞춰 12ㆍ12 군사반란 및 5ㆍ18 민주화운동 재수사 여론에도 불이 붙어 징역 17년에 2,628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사면은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 이뤄졌다. 그는 전 전 대통령과 달리 추징금을 꾸준히 납부해 2013년 완납했다.
사면 후에는 건강이 계속 악화해 숨질 때까지 가급적 외부 노출을 피했다. 2002년 전립선암 투병 사실이 공개됐고, 소뇌 위축증까지 앓아 말년을 대부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 2003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 참석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보였다. 2011년 4월엔 가슴 통증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가 7㎝의 한방용 침이 기관지를 관통한 것이 발견돼 제거 수술을 받는 등 이따금 위독설이 나오기도 했다. 노태우ㆍ전두환 두 사람은 2014년 마지막으로 만났다. 문병 차 전 전 대통령이 그를 찾아갔지만 이미 대화가 불가능할 만큼 건강 상태가 나빴다.
거동은 힘들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아들 노재헌씨를 통해 자신이 주도한 과거 국가폭력에 사죄했다. 노씨는 2019년부터 광주를 찾아 부친을 대신해 5ㆍ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있다. 신군부 직계 가족 중 처음이다. 그는 지난해 5월에도 5ㆍ18민주묘지를 방문해 “13대 대통령 노태우 5ㆍ18민주영령을 추모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조화를 헌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