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26일 내놓은 '가계부채 관리 강화방안'에서 전세대출 규제 방침을 아예 빼놓자 규제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전세대출이 가계부채 증가세를 키우는 주범인데, 이를 규제에서 제외하면 맹탕 대책에 불과할 것이란 지적이다.
특히 정부가 규제의 초점을 '상환 능력'에만 맞추면서 수입이 적거나 상환 능력을 입증하기 어려운 저소득층과 청년층 등은 향후 금융권에서 돈을 빌리기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가계대출 증가세는 전세대출이 주도하고 있다. 지난 14일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기준 가계대출은 전년 말 대비 5.30% 증가한 반면, 전세대출은 15.94%나 뛰었다. 집값 상승과 맞물려 전세 보증금이 오르고, 여유 자금이 있는 사람도 금리가 낮은 전세대출에 몰린 결과다.
전세대출 규모가 불어나자 정부는 전세대출 규제를 시사하기도 했다. 특히 유주택자도 갭 투자(전세를 낀 주택 구입)를 위해 전세대출을 활용하는 등 부작용이 커지자, 전세대출 규제는 피할 수 없는 수순으로 보였다.
하지만 정부는 전세대출을 규제에서 제외했다. 정부의 대출 규제 정책으로 여론이 악화하는 가운데, 청와대와 여당 등에서 실수요자 비중이 높은 전세대출은 규제에서 빼라는 압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권대영 금융위 금융정책국장은 "전세대출은 실수요 측면이 강하다는 지적을 일단 정부가 수용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전세대출을 옥죄지 못하더라도 서민·실수요자 반발을 잠재우는 게 더 급했다는 의미다.
가계부채 증가세의 주범인 전세대출에 아예 손대지 않은 대책은 '속빈 강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은행권이 전세대출 한도를 '증액 범위 내'로 축소하는 등 보완책을 마련했으나 전체적인 증가세를 꺾기엔 한계가 있다. 전셋값 상승으로 전세대출 규모 자체가 크고, 필요 자금보다 더 빌리는 차주도 세세히 가려내기도 어렵다.
금융위는 대신 가계부채 증가세가 잡히지 않을 경우 전세대출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원칙을 공개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금융위가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 눈치를 봐가며 민감한 정책을 일단 미뤘다고 본다. 정책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부 교수는 "금융위가 전세대출을 차질 없이 공급하라는 대통령 한마디에 물러난 셈인데 이런 가계부채 대책은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 대책의 골자인 DSR 규제 조기 시행이 저소득층, 자영업자, 청년층 등 금융 소외계층에게 더 불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DSR 규제로 소득에 따라 대출 한도가 달라지는 만큼 저소득층이나 현재 소득이 적은 청년층은 대출액이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득을 축소 신고하는 자영업자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5억 원짜리 아파트를 산다면 기존엔 저소득층이든 고소득층이든 해당 지역의 주택담보인정비율(LTV)만큼 비슷한 액수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저소득층, 청년은 고소득층보다 대출 한도가 축소, 대출을 활용한 자산 불리기를 시도할 기회가 줄어든다. DSR 규제가 부자로 가는 사다리를 걷어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위는 DSR 규제가 이미 금융권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사람에게 타격을 주고, 저소득층·청년·자영업자가 피해볼 가능성은 적다는 입장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번 대책은 기존 대출이 많은 사람은 추가 대출을 받기 어렵고, 대출액이 적으면 영향을 받지 않게 설계됐다"며 "특히 저소득층의 경우 돈을 빌린 후 갚지 못했을 경우도 염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