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올해는 선선한 가을바람을 도둑맞아 억울하다고도 한다. 입버릇처럼 ‘덥다, 덥다’ 하다가 어느덧 ‘추워, 추워’ 하고 있다. 말이란 서로서로 그물처럼 얽혀 있다. 날씨는 ‘덥다, 춥다’로, 사물의 온도는 ‘뜨겁다, 차갑다’로 말한다. 그런데 말에도 사연들이 많은지, 규칙을 정리하고자 들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국의 사계절을 나타내는 말을 보자. 따뜻한 햇살, 따뜻한 봄바람처럼 봄은 ‘따뜻하다’. 알맞게 따뜻하다는 ‘다습다, 다스하다, 따스하다’ 등도 있다. 여름 날씨는 ‘덥다’와 ‘뜨겁다’로 표현된다. ‘더운 날씨, 더운 국물’, ‘뜨거운 햇볕, 뜨거운 다리미’처럼 이 말은 대기의 온도뿐만 아니라 사물의 온도도 나타낸다. 더위가 한풀 꺾이는 가을을 그려낼 말은 추위의 정도에 따라 다양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알맞다는 ‘시원하다, 선선하다’, 서늘한 공기와 바람처럼 기온이 꽤 찬 느낌이 있다는 ‘서늘하다, 싸늘하다’가 있다. 날씨나 바람 따위가 음산하고 상당히 차가울 때는 ‘쌀쌀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몸이 떨리고 움츠러들 만큼 찬 느낌이 들면 ‘춥다’고 한다. ‘차다’나 ‘차갑다’는 ‘찬 음식, 찬 바람, 차갑게 식은 커피, 차가운 날씨’ 등 물체의 온도나 날씨에 두루 쓰인다. 그리고 원래 차가워야 할 겨울 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따뜻하면 ‘푹하다’나 ‘푸근하다’라고 한다.
이처럼 날씨는 ‘덥다, 춥다’로, 온도는 ‘뜨겁다, 차갑다’로 꼭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다’에서 보듯, ‘찬물, 찬밥’의 건너편에 ‘더운물, 더운밥’이 있다. 흥미롭게도 표준어에서 온도의 ‘차다’와 기온의 ‘덥다’가 짝을 지을 때, 방언에서는 ‘차다’와 ‘뜨겁다’가 제 짝을 지키고 있다. ‘찬밥, 찬물, 찬방’에 대해 ‘뜨신밥, 뜨신물, 뜨신방’이라는 예가 그러하다. 그리고 ‘갓 지은 밥’이나 ‘데운 목욕물’을 두고 ‘덥다’로 말한다. 높은 온도가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할 때는 ‘식기 전에 드세요’라 하지만, 차가운 음료의 온도가 올라갈 때는 ‘시원할 때 드세요’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온도를 높이는 사람의 노력을 높이 사려는 생각일까? 늘 차갑고 추운 것, 뜨겁고 더운 것을 말하면서도 말의 관계에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제는 목욕탕 수도꼭지의 방향을 바꿀 때에도 ‘찬물’과 ‘더운물’의 묘한 공생관계가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