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이 넘치는 정치권에서도 원희룡 전 제주지사는 '최고 수재'로 꼽힌다. 대학수학능력시험 격인 학력고사에서도 수석, 사법시험에서도 수석이었다. 올해로 정치 경력 21년째. 정치 성적표엔 1등을 새기지 못했다. 1964년생인 그가 '만년 소장파'로 불리는 건 '원희룡의 시간'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원 전 지사가 요즘 '재발견'되고 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홍준표 의원에게 마음 주지 못하는 보수진영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를 자주 호명한다. 내실 있는 정책 토론, 대장동 의혹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실력을 보여줬지만, 지지율 상승은 아직이다.
'수재'답게, 원 전 지사는 자신의 대선 성적표를 냉철하게 분석했다. 21일 서울 여의도 대선캠프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정권교체를 바라는 분노가 가득한 상황에서, 도덕성보다는 '악당을 깨뜨릴 파괴력'을 가진 대선주자를 유권자들이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내가 악당을 물리칠 캐릭터가 아니라는 건 선입견”이라며 “모든 걸 걸고 싸울 수 있는 전투력이 있다”고 자신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07년 이후 두 번째 대선 도전이다. 왜 '원희룡 대통령'이어야 하나.
“3선 국회의원, 재선 제주지사를 지내면서 정치력과 국가운영능력을 착실히 다졌다. 한마디로 대통령을 잘할 준비가 됐다. 이재명 후보와 견주면, 정책 능력부터 사람 됨됨이까지 모든 분야에서 내가 우위다. 국민의힘의 본선 필승 후보는 나다.
대선후보 경선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와 국민의힘 주자 한 명씩을 가상대결에 붙이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도 나의 경쟁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내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대통령이 되면 무슨 정책부터 실행할 건가.
"국민의 불안을 해소해야 한다. 혁신성장을 이뤄야 하는 만큼, 대선 결과가 국가 분열을 초래해선 안 된다. 코로나19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소상공인·자영업자들부터 챙기겠다. 이 분들의 생존 기반 회복을 위해 ‘코로나 담대한 회복 100조 프로젝트’를 시행할 거다. 50조는 대통령 임기 첫해 손실보상금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임기 내내 기반구축 기금으로 쓰겠다."
-2014년부터 제주지사를 지내느라 중앙정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대선 핸디캡 아닌가.
“대중 인지도가 떨어진 건 사실이다. 대신 하나의 국가를 운영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시간을 보냈다. 정치력과 내공이 커졌다. 국가 운영에 필수인 '나와 다른 세력을 포용하고 협상하는 능력'도 많이 키웠다. 말하자면, 제주에서 '대통령 특수훈련'을 받고 돌아온 것이다.”
-지지율이 좀처럼 뜨지 않는 이유, 뭐라고 보나.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이 크다. 586 운동권 세력이 '권력 공동체' 노릇을 한 것이 국민의 분노를 키웠다. 도덕성이 조금 낮더라도 악당 집단을 깰 파괴력 있는 후보를 국민이 원할 수밖에 없다. '원희룡은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시기에 나라를 잘 운영할 사람이지, 이런 난세에 악당을 물리칠 캐릭터는 아니지 않느냐'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악당과 맞닥뜨렸을 때 가족과 동료를 지키기 위해 모든 걸 걸고 싸우는 사람이다. 전투력이 강하다.”
-유권자들의 평가가 달라지는 걸 체감하나.
“물론이다. 나는 '떡상'(급격한 상승을 뜻하는 은어) 중이다. 윤 전 총장과 홍 의원 지지율을 역전시키는 건 시간 문제다. 다만 그 시간이 일주일일지, 한 달일지는 운명에 맡기려 한다."
-대선 출마선언 당시 본인이나 윤 전 총장 중에 대선후보가 나올 거라고 예측했는데.
“윤 전 총장이 지금도 유력하긴 하다. 그런데 요즘 하는 걸 보니 참 그렇다. 윤 전 총장과 홍 의원이 막상막하가 됐다고 본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큰절을 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윤 전 총장의 ‘전두환 옹호’ 발언은 어떻게 보나(원 전 지사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주자로서 전 전 대통령에게 세배를 했다).
“과거를 용서하고 미래로 가자는 뜻에서 세배를 한 건데, 국민은 ‘누구 마음대로 전두환을 용서하냐’고 질타하셨다. 곧바로 국민 앞에 사죄를 드렸고, 지금도 국민들의 뜻을 간직하고 있다. 윤 전 총장은 백 번이고 만 번이고 사죄해야 한다. '전 전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 빼고는 정치를 잘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망언이다.”
-윤 전 총장과의 후보단일화 혹은 연대설이 한때 돌았다.
“윤 전 총장이 나로 단일화를 한다고 하던가? 원희룡으로 단일화하는 게 아니라면,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11월 5일(국민의힘 대선후보 확정일)에 목맬 필요 없다'는 발언이 윤 전 총장 리스크, 즉 후보교체론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됐다.
“대선후보 경선이 끝나도 내가 할 일은 남아 있다는 얘기다. 내가 대선후보가 되지 않는다고 보따리 싸고 집에 가지 않겠다는 거다. 이재명 후보를 잡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정치 개혁을 위해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후보교체론을 말한 게 아닌가.
“해석은 정치 평론가들에게 맡기겠다.”
-윤 전 총장을 평가한다면.
“대인배 같은 느낌을 주는 건 장점이다. 기질이 보스 같다. 단점은 대통령을 할 준비가 너무 안 돼 있다는 것이다. 국민도 이 점을 다 아신다. 준비 부분에 대해선 국민의 기대치가 굉장히 낮다. 그런데도 스스로 너무 아는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단점이다. 대통령은 퀴즈 박사일 필요 없지만,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해선 안 된다. 아는 척하면서 장황하게 말하다보니 망언과 실언이 나오는 것이다.
-홍준표 의원은 어떤가.
“홍 의원과 토론하는 것이 가장 재밌다. 그의 장점은 순발력이다. 정치 감각은 천재라고 할 정도로 뛰어나다. 토론 중에 대답을 잘 못하면서도 밉지 않게 잘 넘어가는 대처 능력도 훌륭하다. 너무 우긴다는 것, 지난 대선에 출마한 후로 공부를 더 안 했다는 건 단점이다. 당대 경쟁자들을 밀어내기만 하면 정권교체 열망을 업고 대선에서 이긴다고 보고 준비를 덜한 것 같다.”
-유승민 전 의원과 스스로 장점이 겹치지 않나.
“유 전 의원은 체계적인 경제ㆍ국방ㆍ안보 지식 면에선 국내에서 손꼽히는 전문가이고, 천재다. 다만 고집이 세고 절대 누군가에 지려고 하지 않는 건 문제다. 학자적 지식만으로 승부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