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급등으로 이달 물가상승률이 10년 만에 3%대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등 ‘물가 위기’가 현실화하자, 정부가 결국 유류세를 낮추기로 했다.
유류세 인하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힌 지 사흘 만에 기존 입장을 뒤엎은 것이다. 부처 간 엇박자로 오락가락하다,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시행을 검토하는 등 주먹구구식 늑장 물가 정책이 반복되면서 서민경제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에너지 급등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유류세 인하를 내부적으로 짚어보고 있다”며 “국제유가가 이미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선 만큼 다음 주에는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하율과 관련해선 “몇 가지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덧붙였다.
홍 부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2018년 국제유가가 배럴당 70달러를 뚫었을 때 시행한 유류세 인하 처방을 사실상 공식화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2018년 11월부터 6개월간 15%, 이후 3개월은 7%의 유류세 인하 조치를 시행했다. 유류세율은 정부가 국회 의결 없이 최대 30%까지 인하할 수 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70달러를 넘긴 지난 8월부터 유류세 인하 요구가 빗발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늑장대응이란 지적이 나온다. 그마저도 에너지를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와 엇박자로 갈팡질팡하면서 경제정책 일관성까지 갉아먹었다.
앞서 지난 15일 국정감사에서 산업부는 “유류세 인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물가관리 주무부처인 기재부는 17일 공식 입장을 내 “검토한 바 없다”고 못 박았다. 하지만 3일 만에 다시 유류세 인하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홍 부총리는 “유류세 인하는 유가 전망을 토대로 고려하고 있었지만 내용 확정 전 공개됐을 때 혼란을 감안해 내부적으로만 검토했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홍 부총리가 그간 정책 일관성을 강조해 온 점을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부가 공식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게 오히려 시장 혼선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나온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부처 간의 손발이 맞지 않는 건 상당한 문제”라며 “정책 시행 골든타임도 놓칠뿐더러, 오락가락하는 정부를 누가 믿겠냐”고 지적했다.
부처 간 엇박자 논란이 불거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공공요금 인상 문제 역시 부처 간 서로 다른 의견을 내면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재부가 도시가스 등 공공요금을 연내 동결하겠다고 밝힌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 산업부는 “액화천연가스(LNG) 등 원료비 인상이 계속돼 요금 인상에 대해 협의할 계획”이라며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물가 안정 역할을 해온 공과금 인상 압력이 폭발 한계점까지 치닫는 동안 손 놓고 있다가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서다보니, 제대로 된 의견조율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현재 정부는 가스요금을 올릴 경우 서민경제 어려움이 가중되는 만큼 LNG 할당관세 인하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부랴부랴 시간에 쫓겨 마련한 방안은 임시방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물가 안정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4월 이후 물가 급등세가 계속되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쌀 할인행사 연장, 달걀 공판장 시범운영, 국내 비축유 재고 상황 점검 등을 안정화 방안으로 내놨으나, 최근 물가 오름세를 잡기엔 역부족이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농축수산물의 관세 부담을 완화하고 수입량을 늘리거나 선복량 확보, 물류비 지원 등 물가안정을 위한 총력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