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의 덫에 걸린 가해자

입력
2021.10.21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000m 결승에서 최민정과 심석희가 충돌하자 현장을 지켜보던 기자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데 믹스트존에 나온 최민정이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불화설이 돌았다.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최민정은 "석희 언니와는 서운한 부분이 있어도 특별히 얘기할 것은 없다"고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남겼다.

그 전날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에서도 노선영의 '왕따 의혹'이 불거진 터라 두 선수를 향한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한편으론 금메달을 놓쳐 누구보다 안타까웠을 선수들의 심정을 잔인하게 매도하는 것 같아 더 이상의 상상을 자제했다.

그때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 건 당시 심석희와 A코치가 나눈 SNS 대화가 얼마 전 한 매체에 의해 공개되면서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최민정과 동료들을 두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비방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 A코치와 심석희는 "브래드버리 만들자"는 이야기를 나눴다. 브래드버리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전에서 꼴찌로 달리다 앞선 선수들의 연쇄 충돌 덕에 금메달을 가져간 호주 선수다. 고의 충돌에 승부 조작 의혹까지 제기됐다.

심석희는 대표팀에서 격리 조처됐고, 이 문제는 국정감사에까지 소환됐다.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온 SNS 대화는 다름 아닌 조재범 전 코치에 의해 유출됐다. 그는 제자였던 심석희를 미성년일 때 여러 차례 성폭행한 것으로 밝혀져 징역 13년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조씨 측은 '변호인 진술서'와 조씨의 자술서를 지난여름 언론사들에 제보했지만 언론들은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성범죄 피의자의 주장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고, 심석희의 인성을 문제 삼아 악의적인 프레임 전환 시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한 연예 매체에 의해 보도됐고 침묵을 지키던 심석희는 뒤늦게 미성숙한 태도와 언행을 사과하며 설마 했던 내용은 사실로 드러났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다. 심석희가 누구인가. 2년여간 언론을 도배한 피해자다. 이번 논란은 별개의 사안이지만 심석희를 바라보던 측은지심은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원치 않은 사생활과 비공개 문건 유출 피해자로만 보기엔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다. 그중 평창동계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딴 뒤 "금메달을 땄다는 게 창피할 정도다. 차라리 박탈당하고 싶다"는 심석희의 말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처절한 성폭행 피해자에서 인성 파탄자로 전락한 심석희의 추락은 씁쓸하다. 궤멸한 줄 알았던 한국 빙상의 파벌 문제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심석희뿐 아니라 당시 너나 할 것 없이 휴대폰을 꺼냈다는 빙상인 B씨의 증언이 놀랍다. 지금은 소위 '라인'이란 게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한체대(한국체육대)의 힘이 굉장히 강해 본인들이 피해를 받을까 봐 서로 서로 몰래 녹음을 했다는 것이다. 이번 일로 대표팀 내 선수들 간 신뢰는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최민정은 같은 상황이 재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심석희는 동료들에게, 빙상계에 백배 사죄해야 마땅하다. 다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미안하지만 조재범이 의도했던 대로 흐르진 않는 분위기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고도의 언론플레이로 한국 빙상 전체를 막장으로 몰아넣은 조재범을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성환희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