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버스를 탔다. 싱가포르 화교 가수 린쥔제의 ‘강남(江南)’을 듣고 또 듣는다. 여행은 유행가에 심쿵하는 심장박동과도 같다. 1시간 반 거리에 강남 수향 시탕(西塘)이 있다. 수향마다 개성이 강해 가는 곳마다 신선한 역사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시탕은 그 어떤 마을보다 따뜻한 ‘인간미’가 있다. 무료로 뜨거운 물을 마실 수 있는 물통이 마을 곳곳에 30여 개나 있다. 1년 365일 무료 물통이 있는 마을은 거의 없다. 왜 이런 선행을 베푸는가? 저장성 자싱(嘉興)에 위치하며 영화 ‘미션임파서블3’ 촬영지로 유명한 시탕으로 간다.
정문은 남쪽에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호수 공원이 깔끔하게 조성돼 있다. 아리따운 아가씨 조각상이 하나 서 있다. 청나라 말기부터 구전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 우구냥(五姑娘)이다. 지주 집안의 다섯째 딸이 머슴과 사랑에 빠졌다. 둘은 몰래 도피했다. 이복형제의 반발과 퇴직 관리의 박해를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된 비극이다. 농사지으며 부르는 노동요로 만들어졌다. 100여 년을 이어온 구전 가요가 1950년대 유명 극작가인 구시둥에 의해 음악극으로 개편했다. 2004년 제7회 중국예술제에 참가했다. 지방 전통문화 발굴을 위해 정부가 주관하는 대회로 문화대상(文華大獎)을 받았다.
잔잔한 도랑이 보인다. 돌다리 서너 개를 지나 수향으로 들어간다. 공예품 가게와 식당이 이어진다. 대낮인데 홍등을 밝힌 객잔 벽화는 수향 이미지를 거칠게 그렸다. 함수교(含秀橋) 앞에 이르니 재신당 지붕에 복록수를 관장하는 신이 환하게 웃으며 반겨준다. 검은 덮개의 오봉선(烏篷船)이 정박해 있고 하얗게 칠한 담장이 담백하다. 고스란히 도랑으로 반영돼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하고 있다.
졸졸 도랑을 따라가다가 섬교(纖橋)에 올라서니 호국수량왕묘(護國隨糧王廟)가 정면에 나타난다. 시탕 주민에게 생명의 은인인 인물을 신명으로 봉공한다. 시탕에만 존재하는 지방신이다. 인간미 넘치는 수향으로 만든 고사 중 하나다.
황제의 어명으로 곡식을 호송하던 관리가 시탕을 지나게 됐다. 대략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시대다. 당시 시탕 일대는 흉년과 재해가 덮쳐 기근으로 허덕였다. 주민 상태를 보니 당장 굶어 죽게 생겼다. 이를 불쌍히 여긴 관리는 밤새 잠을 이루고 못하고 뜬눈으로 고민했다. 아침이 밝자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에게 곡식을 모두 나눠줬다. 엄중한 국법을 피하기 어렵다 생각했다.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하룻밤 고민으로 황제의 죄인이 됐지만, 구세주로 오늘날 추앙받게 됐다. 은혜를 입은 주민이 푼돈을 갹출해 사당을 세웠다.
성이 김씨로 알려졌다. 전쟁터도 아닌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애민을 실천했다. 김공전(金公殿)에 앉은 관리는 지금도 수향을 지켜주는 신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탐관오리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 보기 드문 인물이다. 매년 그의 출생일인 음력 4월 3일에 축제를 연다. 오후 11시에 출발해 수향을 한 바퀴 행진하고 3일 내내 잔치를 연다. 아전이 멘 가마를 타고 가는 관리와 행진하는 장면을 조형물로 꾸며 전시하고 있다.
사당을 나와 기역(ㄱ) 자로 꺾인 도랑을 따라 걷는다. 도랑과 가게 사이 통로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오토바이가 지날 정도니 좁은 편은 아니다. 기둥을 설치하고 차양을 쳐서 비와 햇볕을 가려준다. 500m 넘는 거리가 다 이렇다.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납치된 아내를 찾아 뛰어가는 장면을 촬영한 길이다. 아주머니들이 오가며 청소를 해서 굉장히 깨끗하다. 먹거리와 공예품, 생필품 파는 가게가 끝까지 이어진다. 가게 앞쪽 도랑도 길게 뻗어있다.
물과 더불어 사는 수향은 돌다리를 건너 이동한다. 환수교(環秀橋)에 오른다. 봉긋한 돌다리 위에 오르니 오봉선 몇 척이 정박해 있고 덮개 없는 배는 열심히 쓰레기를 낚고 있다. 수면은 너무나 잔잔해 마치 거울 같다. 검은 기와와 하얀 담장의 가옥은 수심만큼 잠겼다. 옛집을 개조한 객잔은 물속으로 빠진 듯하고 도랑의 숨결조차 들릴 정도로 가깝다. 집마다 홍등을 걸어 운치 만점이다.
출렁이는 물결 소리 들리는 객잔에서 하루 묵고 싶었다. 2013년 9월 생일날 소원을 풀었다. 마침 혼자 답사 중이었다. 2층 객잔에서 도랑을 바라보며 자축을 했다. 낮부터 밤까지 도랑만 바라봤다.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와 야경으로 부활하는 장면까지 오롯이 즐겼다. 밥과 요리를 테이크아웃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바라봤다. 야경에 취해 어떻게 잠을 잤는지 지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도랑을 따라 걷는다. 차양이 더위를 가려주고 있는 길을 연우장랑(煙雨長廊)이라 부른다. 안개비와 기나긴 복도를 합친 말이다. 시탕에 남겨진 또 하나의 인간미다. 시탕에 전래되는 감동 스토리가 있다.
명나라 숭정제 시대에 마음씨 착한 가게 주인이 있었다. 어느 날 비가 몹시 내렸다. 가게 문을 닫으려는데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걸인을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와 쉬라는데 한사코 사양했다. 애처로웠던 주인은 할 수 없이 대나무 발을 가져와 처마에 차양으로 걸었다. 비를 피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다음날 문을 여니 걸인은 보이지 않았다. 기둥에 생생하게 글자를 남겼다.
"복도의 차양 덕분에 하룻밤 바람과 비를 피했네(廊棚一夜遮風雨),
선의를 베풀고 덕을 쌓은 사람에게 행운이 오리라(積善人家好運來)"
걸인은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축복을 기원했다. 주인은 깨달을 바가 있어 나무와 기와를 구입해 차양을 도랑까지 넓혔다. 비는 물론이고 햇볕도 피할 수 있어 가게 앞에 머무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가게가 번창했다. 소문이 퍼져 옆 가게도 차양을 설치했다. 옆의 옆 가게도 따라했다. 지금처럼 긴 복도가 생겼다.
연우장랑을 걸으면 안개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가슴이 촉촉해진다. 인간미 넘치는 사연이 많은 시탕이다. 수향 곳곳에 무료로 뜨거운 물을 제공하는 마음과 깊이 잇닿아 있다. 선행이 몸에 밴 수향이다. 마치 고향에 온 듯 편하다.
오봉선 따라 연우장랑을 계속 걸어간다. 차양을 치니 다소 어둡다. 대낮에도 홍등을 밝힌다. 수향 한가운데 있는 영녕교(永寧橋)에 다다른다. 오후의 햇살이 강하니 돌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반영이 실제보다 선명해 보인다.
건너 쪽에 탐 크루즈가 보인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다리를 건너 뛰어가는 모습이 기억날 듯하다. 영화 안내판까지 도랑에 쏙 담겼다. 다리 위에 오르니 멀리 도랑 끝까지 한눈에 펼쳐진다. 약 300m 떨어진 환수교까지 긴 거울이 깔린 듯하다. 다리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풍광을 바라본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점차 어둠이 짙어지기를 기다린다.
완전히 어두워지니 홍등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영녕교와 딱 붙은 명당자리 식당이 있다. 도랑 쪽 창문이 있는 자리는 금방 찬다. 연인에게 고백하기 딱 좋은 자리다. 부부 금실을 다잡을 수도 있다. 그냥 낭만 그 자체다.
다리를 건너면 영녕교와 직각으로 마주 선 안경교(安境橋)가 있다. 여기서 보는 풍광도 멋지다. 왼쪽으로 영녕교가 있고 오른쪽으로 이어진 도랑은 남북으로 길다. 도랑이 동서로 긴 영녕교 방향과 교차하는 위치다. 시탕의 중심이다.
안경교를 지나 동쪽으로 가면 뜻밖의 광경이 펼쳐진다. 조용한 수향에 갑자기 유흥가가 등장한다. 환락의 밤이다. 100m에 이르는 거리가 젊은이의 명소다. 대도시인 상하이와 항저우가 모두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다. 두 도시의 중간 지점이다.
라이브 음악으로 시끄럽고 스테이지에는 춤추고 즐기는 젊은이로 넘쳐난다. 자꾸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한다. 혼란스럽고 난감하다. 무대에서 온몸을 흔들고 광란을 연출하는 무희가 유리창에 비친다. 수향마다 유흥가가 있긴 해도 시탕처럼 이렇게 성황을 이루진 않는다.
시끄러운 동네를 벗어나 되돌아온다. 어느 돌다리에 서도 수향의 야경은 그저 정지화면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휘황찬란한 화면으로 짙어간다. 적막을 깨고 노 젓는 소리가 찰랑거린다. 도랑을 유람하는 오봉선이 오후 9시까지 운행을 한다. 10여 명이 탈 수 있는 배다.
인원과 무관하게 한번 유람하는데 얼마라는 식이다. 오후 6시부터는 2배 이상 비싸다. 야경이 낮보다 2배 이상 멋지다고 생각하면 된다. 역시 금전으로 모든 서비스의 가치가 정해지는 중국답다. 야경 속으로 들어간다. 약 200m를 지나 환수교를 지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코스다. 줄줄이 내려선 홍등으로 인해 도랑은 진풍경이다. 배가 지나가며 일으킨 작은 물살이 소소하게 스펙트럼처럼 퍼진다. 데칼코마니가 되니 더 화려한 수향이다.
시탕에 가면 단골로 가는 숙박시설이 있다. 북문과 가까운 반탕(半糖)호텔이다. 수향 중심에서 걸어서 3분 거리다. 2017년에 5성급 호텔로 선정돼 스타상을 받았다. ‘이탈리아 밀라노 디자인 주간(Italian Milan Design Week)’에서 입선한 호텔이다. 인테리어와 외관이 아주 세련되고 포근하다. 우연히 발견한 호텔치고 최상이다. 숙박비가 약 6~7만원 가량인데 만족도는 100%를 넘는다. 로비에서 늦게까지 춤추고 놀아도 된다.
로비에서 미주(米酒)를 열어 마신다. 쌀로 빚은 술인데 계화 향이 난다. 약간 달짝지근해도 상큼하고 가벼운 술맛이다. 쉬탕(胥塘)이라 적힌 포장지 때문에 샀다. 쉬탕은 춘추시대 오나라의 책사인 오자서와 관련돼 있다. 오자서가 건설한 제방이란 말로 시탕의 옛 지명이다.
오나라 땅 사람들은 발음을 부드럽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오농연어(吳儂軟語)라 한다. 쉬(胥)와 시(西)는 발음이 같다. 기원전에 제방이 있던 땅이다. 지금도 남쪽에 쉬탕이란 다리가 있다. 시탕에서 쉬탕 브랜드의 술이라 그런지 더욱 달콤하다. 수향의 하룻밤 꿈에도 술술 시간여행을 즐기게 된다.
아침이 밝았다. 수향에서 묵으면 상큼한 아침 모습과 만날 수 있다. 인적이 드물어 고요하다. 도랑을 청소하는 배만 작은 움직임을 보일 뿐이다. 노를 보니 생각보다 수심이 깊은 듯하다. 아침을 여는 주민들 모습에 목숨 바쳐 구휼한 수량왕이나 연우장랑의 걸인이 자꾸 오버랩된다.
시탕의 인간미는 하나 더 있다. 시탕의 옛말에 ‘인생행선삼건사(人生行善三件事), 수교포로건랑붕(修橋鋪路建廊棚)’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태어나 3가지의 착한 일을 해야 한다. 다리를 손질하고 길을 닦고 차양을 세우는 일이다.
선행의 하나인 다리를 손질한 이야기가 있다. 남북으로 흐르는 도랑을 따라간다. 도랑이 점점 넓어진다. 시탕의 쌍교인 만안교(萬安橋)와 안태교(安泰橋)가 엇갈려 있다. 평탄한 만안교는 탐 크루즈가 아내를 구출한 후 걸어가는 장면에 등장한다. 보통 돌다리 아래 뚫린 부분은 원형으로 만드는데 안태교는 들보 5개로 틀을 잡았다. 들보의 반영으로 얼핏 팔각형 모양의 돌다리다. 도랑이 교차하며 2개의 다리가 이어진다. 서로 다르게 건축해 미적 조화를 이룬다.
북쪽 끝에 위치한 와룡교(臥龍橋)가 미담의 주인공이다. 명나라 말기에 처음 세운 와룡교는 나무다리였다. 높고 좁아서 비가 오면 미끄러워 아래로 사람이 자주 떨어졌다.
청나라 강희제 시대였다. 한 임신부가 다리를 건너다 실족해 세상을 떠났다. 대나무 줄기로 제품을 만드는 장인인 주씨가 현장을 목격했다. 마음이 아팠던 주씨는 돌다리로 중건할 생각을 했다. 한낱 장인에 불과했다. 고심 끝에 가산을 팔고 출가했다. 법명은 광연(廣緣)이었다. 사방을 돌며 탁발로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분주하게 다니느라 과로로 병을 얻었다. 임종하며 ‘석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원적 소식을 듣고 배 두 척이 석재를 싣고 왔다. 몇 달 전의 주문이었다. 광연의 승방에 있던 장롱을 뒤지니 거금 3,000냥이 나왔다. 잔금을 지불하고도 모자란 건축비는 십시일반 모아 중건했다. 돌다리가 됐다.
와룡교는 높이가 5.5m로 시탕에서 가장 높은 아치형 다리다. 길이도 31m가 조금 넘고 너비도 5m로 매우 안전한 다리다. 다리 위에 서니 발아래로 나무들이 보인다. 광연의 고뇌와 주민의 인정이 모여 시탕의 자랑거리를 세웠다. 일생을 살며 이런 선행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
수향 중심으로 되돌아온다. 시탕에서 가장 번화한 서가(西街)로 간다. 500m에 이르는 거리로 가게가 아주 많다. 공예품 거리이자 먹자골목이다. 명망가나 상인이 살던 저택도 몰려 있다. 옛 가옥을 개조해 만든 전시관과 박물관도 있다.
다닥다닥 붙은 저택 사이의 골목을 룽탕(弄堂)이라 부른다. 남방에서 주로 쓰는 용어로 북방의 후퉁(胡同)과 비슷한 말이다. 바닥에 남은 물기와 담장 아래 이끼가 푸릇한 스피룽(石皮弄)이 있다. 한 사람 겨우 지날 정도로 좁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온다. 모기보다 가는 목청으로 짖는다. 그냥 빈 공간이어도 좋았는데 뜻밖의 견폐(犬吠) 덕분에 유쾌해진다. 개 견(犬)에 입 구(口)를 붙이면 ‘짖을 폐’가 된다. 귀여운 깨갱 소리에 사전을 뒤졌다.
다시 영녕교 위에 선다. 중국 아가씨가 사진을 찍고 있다. 하늘색보다 더 새파란 반영 빛깔에 매료된 듯하다. 물과 더불어 오랜 세월 살아온 공간이다. 수향마다 저마다의 역사와 문화를 머금고 있지만, 시탕만큼 애틋하고 따뜻한 엄마 품 같은 수향도 없을 듯하다. 세상 살며 공동체를 위해 선의를 발휘해 선행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미 풍부한 시탕에서 1박 2일을 보내니 따뜻한 물 한 잔 깊이 들이마신 느낌이다. 그야말로 ‘휴머니즘 수향’이라 불러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