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은 구소련 지역에 흩어져 사는 소수민족 가운데, 독립된 국가를 만드는 데 성공한 타타르·우크라이나인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성공한 집단 중 하나로 꼽힌다.강제이주의 박해에도 중앙아시아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며 자수성가했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황만금·김병화 등 고려인 1세대의 이름을 딴 마을까지 있다.
이런 빼어난 성공 사례들은 역설적으로 무국적 고려인들을 잊히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모국인 한국에서조차 정치인으로 기업인으로 성공한 고려인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서 무국적 고려인의 존재는 더 희미해졌다.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계기로 무국적 고려인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조치를 취했다. 600여 명이 지난 2년여간 이를 통해 구제됐지만, 현지에서 1만여 명으로 추산하는 전체 무국적 고려인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그마저도 고려인문화협회를 포함해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 단체들이 발로 뛴 결과다. 고려인문화협회는 무국적 동포를 위해 필요한 서류를 안내하고 국적 신청 절차를 대신 밟아 줬다. 박 빅토르(63) 고려인문화협회장은 6일(현지시간) 타슈켄트의 협회 사무실에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집집마다 방문해서 실태조사를 했다"며 "신청자 중 신상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국적을 받았다"고 성과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림자처럼 숨어 사는 무국적자까지 끌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국적 취득의 최대 난관은 거주지 등록에 필요한 벌금을 마련하는 일인데, 이는 민간단체의 지원 능력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 단체가 50여 개가 넘지만, 막상 본보가 현지에서 만난 무국적 고려인 중에는 동포 단체의 존재를 아예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려인 단체 관계자는 "고려인 커뮤니티 내에도 사각지대는 존재한다"며 "경제력 차이가 점점 벌어지면서 소외된 고려인도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인구의 0.6%에 불과할 정도로 소수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들이 많다. 박 회장은 30대 때 산업부 차관을 지냈고, 현재 하원의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신 아그리피나 전 상원의원은 2017년 초대 유아교육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장 발레리(75) 민족우호교류위원회 부위원장은 상원의원과 우즈베키스탄항공회장을 지냈다.
이처럼 고려인 성공 신화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빈곤과 내전으로 중앙아시아 일대를 떠도는 무국적 고려인이 여전히 적지 않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조부모의 땅인 한국을 찾아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국내에 체류하는 무국적 고려인 동포의 처지에 무관심하다. 외국 국적 동포를 관리하는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국내 무국적 고려인 현황을 집계한 적이 없다. "국적이 없을 경우 민족을 따질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다.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흡하나마 현지 고려인 무국적자 실태를 조사하고 국적을 부여했던 우즈베키스탄 정부와도 비교된다.
한국에 들어온 무국적 고려인을 10년 넘게 지원해온 시민단체 너머의 김영숙 사무처장은 "구소련 시절 여권 또는 CIS(구소련 일원이었던 독립국가들) 국가의 영주권에 민족이 적혀 있는데도 우리 동포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안이한 태도"라며 정부를 질타했다. 그는 "우리 정부가 일부 고려인 지도층과만 소통하면서 정작 한국에 들어와 있는 무국적 고려인에겐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고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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