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5,000원이야, 4,000원만 받아!”
지난주 평일 오후 울산 야음시장. 고구마 한 소쿠리를 두고 상인과 손님 간에 실랑이가 한창이다. “팔아서 남는 게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고구마를 검은 봉지에 주섬주섬 담고 보는 상인, 못 이기는 척 5,000원을 내는가 싶던 손님은 기어이 고구마 한 개를 더 챙기고서야 만족한 듯 발길을 돌린다. 흥정과 덤이 오가는, 대형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다. 시민 박모(41)씨는 “스마트폰으로 장을 보고, 주문하면 이튿날 아침 문 앞에 배달되는 시대에 이런 풍경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겠다”며 “물건을 사고파는 곳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이 전통시장도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니 벌써 아쉽다”고 말했다.
19일 울산시 남구 등에 따르면 50년 전통의 야음시장에 주상복합 건물을 짓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민간업자가 지난달 15일 야음시장을 포함한 남구 야음동 815-3번지 일대 5,800㎡ 부지에 지하 5층, 지상 44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을 짓겠다며 건축 심의를 신청했다.
야음시장 내 점포는 120여 곳으로, 이를 운영하는 상인 90%는 세입자들이다. 이 중 20여 명은 건물주로부터 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고, 나머지 상인들도 곧 쫓겨날 위기에 놓여 있다. 길필종 야음시장 상인회장은 “시장 활성화를 위해 투입한 혈세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고 업자들의 배만 불리는 아파트 재개발은 가당치 않다”며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 어디 가서 무슨 수로 새롭게 시작하란 말이냐”고 하소연했다.
지역경제의 기반이자 지역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는 전통시장을 지키기 위해 정부는 매년 4,00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전국의 전통시장이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치 않다. 대구의 경우 지역에 등록된 전통시장 147곳 가운데 49곳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고, 올해에만 중구 동북철물시장과 보성황실시장, 동구 신암시장, 서구 만평시장, 달서구 내당시장 등 5곳의 전통시장 인정이 취소됐다. 한때 300개가 넘는 점포가 성업하던 남문시장도 90여 년 만에 철거가 결정됐다. 경기 성남 성호시장, 부산 국제시장, 경남 함안 가야시장 등 전국 전통시장도 주상복합 건물에 자리를 뺏길 형편이다.
이배경엔 상인 고령화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온라인 쇼핑몰의 급격한 성장이 꼽힌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온라인 쇼핑 거래액은 사상 최고치인 161조1,234억 원으로 전년 대비 19.1% 증가했다. 전통시장도 온라인 판로 개척 등 체질 개선이 절실하지만 종사자 80%가 50대 이상으로 변화된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매년 많은 예산을 들여 현대화 사업 등을 진행 중”이라며 “그러나 효과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 따르면 전국의 전통시장은 2019년 기준 1,413곳으로, 2014년(1,536) 대비 123곳이 줄었다. 매년 전통시장 24개가 사라진 셈이다. 상인들의 세대교체 등을 위해 조성한 청년몰 5곳 중 2곳이 예산 지원만 받고 폐업한 게 대표적이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청년몰 지원 점포 672개 중 283개(42%)가 문을 닫았다.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금전적 지원으로는 전통시장의 자생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송종호 경북대 지역시장연구소장은 “지역경제 실핏줄인 전통시장의 침체는 영세상인, 자영업자의 몰락으로 이어져 실업률 상승과 양극화 심화라는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전통시장이 지역사회의 밑바닥을 받쳐주는 경제 기반은 물론, 문화적 가치를 지닌 공간이라는 점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