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경남 고성 대가면에 암적색 단층 건물이 들어섰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빈민운동가 고 제정구 선생(1944~1999년)의 기념관인 제정구 커뮤니티센터(대지면적 1만9,892.6㎡ 연면적 449.38㎡)다. 건물은 일반적인 기념관과 다르다. 주변을 압도하는 대신 옹기종기 모인 건물들이 조그마한 마을을 이룬다. 설계를 맡은 건축사사무소 이로재의 승효상 대표는 "건축물보다는 풍경을 설계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기념관은 대가저수지에 접한 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 두 채의 박공지붕 건물과 정자, 묵상탑이 자리한다. 빈민운동에 헌신했던 제 선생의 삶을 설계에 반영하고자 했다. 승 대표는 "'가짐 없는 큰 자유'라는 정신을 이야기했던 분을 기억하는 집이니 가장 단순한 건축 형태인 박공지붕의 집을 그렸다"며 "제 선생이 '연대'의 정신을 강조했기 때문에 단독 건물보다는 단층 건물 두 채를 배치했다"고 말했다. 건물 외벽에도 제 선생의 이름이 적힌 표지(標識) 하나 달지 않았다. 인근에 작은 안내판만 설치했다.
내부는 전시실 외에도 북카페, 강당, 교육실을 마련해 문화 공간으로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승 대표는 "사람들이 건물만 들어갔다 나오는 게 아니라 주변을 거닐고 이곳저곳 다니도록 땅에 어울리는 풍경을 설계했다"고 말했다. 이 지역에서 잘 자란다는 백합나무 100그루를 심은 것도 풍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는 "제정구 선생의 집이 아니라 제정구 선생의 숲을 설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제정구 커뮤니티센터는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최근 2021 한국건축문화대상 사회공공부문 대상(대통령상)을 받았다.
제 선생은 1972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야학 교사로 일했던 것을 계기로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철거민들을 이끌고 1977년 경기 시흥 신천동, 은행동 일대에 복음자리라는 마을을 세웠다. 빈민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1986년 평생의 동지인 정일우 신부와 함께 막사이사이상을 공동 수상했다.
건물의 외부 마감재는 특수합금인 '내후성 강판(코르텐강)'이다. "물성이 그대로 드러난 정직한 재료가 좋은 건축의 기본"이라는 게 승 대표의 생각이다. 내후성 강판은 1년에 0.1㎜씩 5년간 녹이 슬고 그 이후에는 녹슨 피막이 내부의 철을 영구적으로 보존한다. 이 때문에 매번 페인트칠을 하지 않아도 된다. 승 대표는 "맨 처음 검은색이던 외관이 점차 암적색으로 변하면서 5년의 세월을 기록한다"며 "건축이 살아 있는 생물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재료"라고 말했다. 착공 시 검은색이던 기념관 외관은 준공 시 암적색으로 변한 상태다. 지금도 하루하루 색이 달라지며 '익어가는' 중이다. 승 대표의 사무실인 이로재 외관도 같은 재료다.
기념관 곳곳에 놓인 제 선생의 동상은 모두 설치미술가인 임옥상 작가의 작품이다. 동상은 정적이지 않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거나,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거나, 의자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는 등 모두 생전의 일상을 옮겨놓은 듯 자연스럽다.
이번 프로젝트는 고성군 측이 제 선생의 삶과 닮은 건축관을 가진 승 대표에게 설계를 요청하면서 성사됐다. 승 대표는 건축에서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는 '빈자의 미학'을 강조한다. 그는 "제 건축이 과장된 폼이나 현란한 색채를 쓰지 못하기 때문에, 저한테 딱 맞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한국에서 기념관은 자주 정치적 논란의 대상이 된다. 건축물로서 좋은 기념관이란 어때야 할까. 승 대표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관에 가면 전사자의 이름이 적힌 검은색 대리석 위에 그걸 바라보는 방문객의 얼굴이 비치면서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며 "좋은 기념관은 찾아간 사람으로 하여금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게 인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정구 커뮤니티센터도 제 선생이 사회에 던진 화두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