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노회찬을 돌아보다

입력
2021.10.16 10:30
영화 '노회찬6411'

편집자주

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국민의 공복이고 임시직인 걸 잊었습니다. 국민의 생활을 낫게 하려고 월급 받는 걸 잊고 있었죠.”
영화 ‘데이브’(1993) 속 데이브(케빈 클라인)

정치의 계절입니다. 내년 3월 치러질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온 나라가 뜨겁습니다. 여러 정책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면 좋으련만, 상대방 비리와 흠집 들추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국가 최고 지도자의 도덕성과 합법성은 매우 중요한 기본 덕목입니다. 하지만 여러 사안을 두고 여야가 교환하는 말싸움이 지나치게 맹렬합니다. 국민을 위해 나섰다는 분들이 정말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 요즘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돈입니다. 수천억 원대 비리 의혹이 있는 ‘대장동 사건’과 관련해 수백억 원 또는 수십억 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정치권과 법조계 등에서 오고 간 일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백미는 “산업재해를 감안한 퇴직금 50억 원” 주장 아닐까요(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대장동 의혹' 등장인물 너무 많다고요? 인맥도를 총정리했습니다).

때마침 한 정치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영화가 14일 극장에 선보였습니다. ‘노회찬6411’입니다. 3년 전 숨진 노회찬(1956~2018) 전 의원의 삶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습니다. 사회와 정치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노 전 의원의 일생이 마음 아프기도 했고, 그의 죽음 이후 정치판이 나아지기는커녕 진흙탕 깊숙이 더 가라앉은 듯해서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지금 이곳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①그는 왜 정치를 했는가

노 전 의원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절에 머물며 사회 변혁과 관련된 서적을 탐독한 후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노동 현장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학출(대학생 출신)’과 달리 노 전 의원은 노동자들 삶 속에 스며들었습니다. 누구도 그를 명문고와 명문대에서 공부한 엘리트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용접공으로 일하는 한편 노동운동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을 통해 노동현장의 변혁을 목도했으나 1990년대 초반 공산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정치로 자신의 활동 영역을 옮기게 됩니다. 그는 진보 정당 건립을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한국 정치 지형에선 진보 정치가 설 자리를 마련하기 힘들 거라는 다수의 비관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진보 정치가 정치권에서 영역을 넓혀가는 데 힘을 보탭니다. 그가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노동 현장 속으로 들어갔을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②세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정치

노 전 의원은 2002년 대선 과정에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합니다. 선거 방송 토론을 위해 민주노동당 대표자로 나섰다가 촌철살인의 달변으로 주목받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화제가 됐던 건 아닙니다. 2004년 국회에 입성하고서도 남다른 행보를 보였습니다. 의원직 상실을 무릅쓰고 ‘삼성 X파일’을 공개했습니다. 삼성이 관리했던 법조인의 면면, 관리 행태 등이 담겨 있는 내용이었는데, 이 내용을 인터넷에 함께 게시했다가 피소됐습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는 항상 낮은 곳에서 국민을 위해 행동하는 정치인으로서 주목받았으나 당권을 휘어잡지는 못했습니다. 자기 사람을 만들고 이들을 관리하며 세력을 확장하면 당내 입지를 다질 수 있을 텐데 마땅치 않은 행동으로 봤습니다. 노 전 의원은 보수든 진보든 중도든 세를 형성해야 목소리를 내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한국 정치판에서 힘을 얻기 쉽지 않았습니다.

③한국 정치는 진화했나

노 전 의원은 진보 정치의 희망을 보았으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진보 세력을 규합해 만든 통합진보당이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13석을 얻으며 약진했으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노선 투쟁과 경선 부정 선거 의혹으로 당이 분열되면서 진보 정치 역시 지리멸렬의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진보 정치가 한국 정치의 제3세력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노 전 의원의 희망 어린 전망은 흐릿해졌습니다.

노 전 의원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됐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불법 정치자금 5,000만 원을 받았습니다. 이를 두고 그의 죽음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와, 실수로 일어난 일이고 다른 정치인들과 비교하면 그리 크지 않은 금액인데 과도하게 비난받는다는 옹호가 맞섰습니다. 어느 쪽 주장에 귀를 기울이든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가 속죄하듯 극단적인 선택을 한 후 한국 정치는 과연 더 나은 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그에게 손가락질할 만큼 떳떳한 정치인은 또 얼마나 될까요.

④왜 정치를 하는가

영화는 노 전 의원이 젊은 시절 머물렀던 절 마당의 나무를 보여주며 끝을 맺습니다. 나무는 노 전 의원이 절에 있던 1980년대 초반보다 더 커지고 가지가 많아졌을 겁니다. 나무는 평화로워 보이면서도 품위 있어 보입니다. 노 전 의원의 영면을 기원하는 듯하면서 그가 남긴 유산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노 전 의원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떠났을까요. 이상적인 정치를 꿈꾸다 현실이라는 장벽을 넘지 못한 불우한 정치인으로 기억해야 할까요. 영화 제목은 노 전 의원의 유지와도 같습니다. ‘6411’은 구로동과 개포동을 오가는 서울 시내버스 6411을 의미합니다. 구로구 쪽에서 강남지역으로 출퇴근하는 청소원이나 경비원들이 이용하는 버스입니다. 노 전 의원은 2012년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 연설을 할 때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저 버스와 이용자들을 언급했습니다. 노 전 의원이 마지막으로 몸담았던 정의당은 그가 숨진 후 ‘6411 정신’이라는 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노 전 의원의 정치적 지향점에 박수를 보낸 이도 있고, 무관심하거나 비판했던 이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처럼 낮은 곳 약자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을 위해 행동했던 정치인이 딱히 없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할 겁니다.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유력 주자들의 보여주기식 민심 행보는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서로를 헐뜯는 말이 급증하고 더 커질 겁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집니다. 그렇게 정권을 잡은 후 누구를 위한 어떤 정치를 하려는 걸까요. 정치의 계절, 정치인이든 누구든 ‘노회찬6411’을 보고 한 번쯤 정치를 되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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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제기 영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