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소 노동자, 1억 연봉이 두 번 하청 거치며 반토막으로

입력
2021.10.19 16:06
8면
[중간착취의 지옥도, 그 후]
<17>공기업 한전KPS의 중간착취 의혹
원청 지급 1억 원 임금이 최종 4,900만 원으로
한전KPS 낙하산, 용역업체 대표로 한몫 챙겨


고(故) 김용균씨가 일했던 그곳,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전기 설비 유지·보수 업무(경상정비)를 하는 12년차 숙련 기술자 김선호(가명·37)씨의 지난해 연봉은 약 4,800만 원(세전)이었다. 그런데 그의 월급을 거슬러 올라가면 애초 금액은 훨씬 컸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됐다.

하청업체 소속인 그는 원청인 한국서부발전에서 시작해 두 단계의 하청을 거쳐 임금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애초 시중노임단가를 기준으로 책정된 1인당 연 1억여원의 인건비가 4,000만 원대로 쪼그라든 것이다.

무엇보다 1차 하청은 공기업인 한전KPS였다. 김씨는 “인건비를 어느 정도 떼어간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금액이 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며 “한전KPS는 공기업이라는 탈을 쓴 인력사무소, 인건비 따먹기하는 회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분노했다. 김씨보다 경력이 적은 동료는 3,000만 원 중반대 연봉을 받고 있다.

공기업에서도 드러난 중간착취

한국일보는 배진교 정의당 의원실이 공기업인 5개 발전사(남동·남부·동서·서부·중부발전)로부터 제출받은 '발전사 경상정비 협력업체별 임금 정산내역서'와 공공운수노조가 확보한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임금명세서 등을 비교했다.

자료들에 따르면, 서부발전은 지난해 한전KPS와 ‘2020년도 태안화력 기전설비 경상정비공사’ 계약을 맺고 인건비로 139억 원을 지급했다. 임금 정산 자료에 기재된 투입인력은 96명. 노조는 1인당 평균 연봉이 1억4,500만 원(부가세 포함) 상당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한전KPS 측은 이 공사의 일부를 두 하청업체에 재하도급을 줬고 노동자 41명을 더 추가해 전체 투입인력은 137명이라고 주장한다. 한전KPS 측 설명대로 계산해도 노동자 1인당 평균 연봉은 1억 원.

하지만 한전KPS가 A업체에 지급한 노동자 1인당 인건비는 7,100만 원(세전)이었다. 발전 비정규직 전체대표자회의 이태성 간사는 "서부발전에서 한전KPS에 준 노동자 인건비가 한전KPS를 거치며 최소 3,000만 원에서 최대 7,000만 원 정도가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인건비는 하청업체에서 다시 한번 착복된다. 공공운수노조가 지난해 A업체 소속 전체 노동자들의 연말정산 영수증을 분석한 결과,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4,900만 원(세전)에 불과했다. 한전KPS가 지급한 돈이 A업체를 거치며 다시 1인당 2,200만 원 정도 줄어든 것이다.



단순업무라 인건비 덜 줬다?

한전KPS 관계자는 노동자 1인당 평균 연봉이 1억 원(서부발전)→7,100만 원(한전KPS)→4,900만 원(노동자 세전 수령액)으로 줄어든 데 대해서는 2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는 "한전KPS는 발전소로부터 받은 공사 물량의 약 10%를 재하도급 주는데, 주로 단순업무를 하청업체에 맡긴다"며 "단순업무는 고급업무보다 인건비가 낮은데, 1인당 평균 임금과 비교해 보이는 착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A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에 따르면, 대부분이 10년 이상 경력을 가졌으며 한전KPS 소속 직원과 거의 동일한 업무를 하고 있다.

한전KPS는 두 번째 이유로 "도급비 산출내역에는 인건비, 이윤, 일반관리비 등이 나뉘어 있긴 하지만 낙찰률을 적용하면 사실상 인건비에 관리비, 이윤 등이 다 포함돼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낙찰률은 경쟁입찰에서 낙찰된 업체가 제시한 금액으로 도급액이 정해지는 것으로, 전체 도급비를 낮춘다.

낙찰률을 핑계로 노무비를 깎는 관행에 대해 김용균 사건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는 "도급비 중 직접노무비에 대해서는 낙착률을 적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했을 정도로 나쁜 관행인데도, 공기업조차 이를 무시하고 있다.

애초 어물쩍 노동자 인건비를 낮추는 나쁜 관행을 없애려고 발전 5개사와 8개 경상정비 협력업체는 지난 1월부터 노무비 전용계좌에 노무비를 지급하는 '적정 노무비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한전KPS는 공기업이라는 이유로 이 사업에서 빠졌다. 공기업이니 임금 중간착취가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따른 것이었는데, 기대는 완전히 어긋났다.

한전KPS 관계자는 "직접인건비에 낙찰률(86~87%)을 곱한 금액의 90% 이상 주도록 하청업체를 유도하고 있다"며 "앞으로 지급률이 더 올라가도록 제도적으로 보완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한전KPS 출신 낙하산, 매년 돌아가며 임금착복

한전KPS와 하청업체가 일부러 1년 단위로만 계약하며 용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막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한전KPS는 원청인 발전사들과 3년 공사계약(경쟁입찰) 또는 사실상의 장기 계약(수의계약)을 맺지만, 하청업체와는 늘 1년 단위로 쪼개기 계약을 맺는다는 것이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똑같은 사무실에서 똑같은 동료들과 일하면서도 매년 새 업체와 새로 근로계약을 맺는다.

2006년부터 한전KPS 하청업체에서 일해온 한 노동자의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를 보면 15년간 회사가 13번 바뀌었다. 건보득실확인서에는 소속 회사가 바뀐 날짜가 나오는데, T하청업체에서 2015년 1월 1일 건보 자격이 상실되면 같은 날 D하청업체에서 바로 자격이 취득되는 식으로, 단 며칠의 구직 기간도 없이 회사 이름만 계속 바뀐다. 배진교 의원은 "노동자들이 한전KPS 하청업체 뺑뺑이를 돌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한전KPS 출신이 하청업체 대표로 오는 '낙하산 인사' 사례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청업체 한 노동자는 "지금까지 일했던 업체 10여 곳 중 3곳의 대표가 한전KPS 출신이었다"며 "현장 업무는 노동자 중 관리자격인 현장소장이 다 맡아서 하고 회사가 바뀌어도 대표 얼굴은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1년에 한 번씩 공사 낙찰받은 회사가 인건비를 착취해 떠나고, 1년 뒤에 다른 회사가 와서 똑같이 착취하고 떠나는 게 반복된다"고 말했다.

배진교 의원은 "일단 노무비 전용계좌를 바로 사용하도록 하고, 근본적으로는 하도급 구조를 바꿔야 한다"며 "발전소 경상정비 업무를 한전KPS로 통합해 재공영화하고, 하청업체 직원의 정규직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