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여아 장난감은 어디에..." '성 중립' 장난감 아직도 멀었다

입력
2021.10.16 04:30
6면
장난감 진열대 '성 중립' 의무화한 미국 캘리포니아주
레고도 남아용·여아용 구분 라벨 제거
인권위도 권고했지만, 시장 변화는 더뎌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는 2024년부터 대형마트마다 '성 중립' 장난감 진열대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어릴 때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세계 최대 장난감 제조사인 레고도 최근 모든 제품에 남아용이나 여아용 등의 성별을 구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처럼 유아제품에서부터 '성 중립'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고 있지만 국내에선 아직까지 이런 분위기와 상당한 온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여자=분홍색, 남자=파란색 ... 여아 완구코너 분리돼있는 마트

실제 15일 방문한 서울 시내 대형마트 3사에서 이런 흐름은 쉽게 감지됐다. 이날 찾아간 대형마트 3사의 완구 코너는 남아용과 여아용으로 분리됐거나 성별에 따라 매장 진열도 색상으로 확실하게 구분됐다.

장난감 색상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아용은 98% 이상이 분홍색이었다. 원래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겨울왕국 엘사를 제외하고는 장난감 포장지부터, 스케치북, 옷장, 샤워룸, 요술봉, 마법장갑세트 등 대부분 소품들이 분홍색 계열로 디자인됐다. 현장에서 만난 한 대형마트 직원도 "분홍색 이외의 여아용 장난감은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사실상 아이들에게 다른 색깔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원천적으로 사라진 셈이다. 마트에서 만난 주부 김선진(36)씨는 "남자 아이들이 주로 좋아하는 헬로카봇 원형 보행기 튜브는 파란색으로만 출시되고, 콩순이 원형 보행기 튜브는 분홍색만 출시돼 선택권이 없다"며 "아이가 분홍색은 여자 색깔, 파란색은 남자 색깔이라고 인식할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성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이 반영된 제품도 많았다. 육아는 부부가 함께하는 일이지만, '엄마놀이'나 '엄마가 되어주세요' 표현 등을 포함한 가사와 관련된 장난감들은 모두 여아용 코너에서만 확인됐다. 반면 남아용 코너에선 '아빠놀이'나 '아빠가 되어주세요' 등으로 표시된 장난감을 찾아볼 순 없었다.

인권위·전문가 "아이들에게 색깔 선택의 기회를 줘야"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장난감을 통해 유아기 가치관을 형성하는 만큼, 특정 성별이나 색깔, 역할에 대한 편견이 생기지 않게 다양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승하 중앙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유치원복, 가방 색깔을 성별이 딱 떠오르는 색이 아닌 성 중립적인 색깔로 하는 이유가 있다"며 "아이들에게 고정관념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폭 넓게 줘야 한다"고 말했다.

만 3세에서 7세는 아이들이 성 정체성을 갖게 되는 시기다. 인권위원회가 지난 5월 장난감 업체들에 성 중립적인 방향으로 영유아 제품을 제조하도록 관행을 개선하라는 의견을 전달한 이유다. 당시 인권위는 "아이들은 색깔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에 따라 여성은 연약하고 소극적으로, 남성은 강인하고 진취적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학습하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사회·문화적 관행에 따른 성역할 고정관념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사회화돼 성차별이 심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소극적인 마트·유통업체·장난감 제조업체 "'성 중립' 장난감? 글쎄..."

하지만 아직 시장의 변화는 더디다. 당장 대형마트와 장난감 유통업체, 제조업체 모두 소극적이다. 대형마트는 장난감 유통업체를 통해 들어온 물건을 소비자가 보기 편하게 진열하고 있다는 설명이고, 유통업체는 물건을 유통할 뿐 기획 권한은 없다는 입장이다. 제조업체는 대형마트를 통해 들어온 주문에 맞춰 생산할 뿐 ‘성 중립’은 고려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장난감 유통업체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색깔의 제품을 많이 만들 수밖에 없다"며 "여자 아이들이 원래부터 분홍색을 좋아하다보니 관련 제품이 많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진단은 다르다. 이 교수는 "100년 전 만 해도 분홍색은 남성의 색깔이었다"며 "여자 아이가 분홍색을 좋아할 거라는 어른들의 고정관념을 주입시키는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소진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