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멈’이란 종이 아닌 신분으로 남의 집에 매여 심부름하던 부인들이다. ‘어멈’ 앞에 ‘조선’이 붙은 바, 이 말은 외국인이 만든 것이다. ‘조선어멈’은 일제 식민지 때 일본인의 집에 얹혀살면서 일한 우리 어머니들이었다. 정작 우리 땅에서 집터를 잃고 가족과 헤어진 많은 어머니들이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조선어멈’으로 불렸다.
말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언어학에서는 ‘유표성’이라 한다. 유표적인 말은 보편적인 말 가운데서 세분화된 개념을 드러낸다. 세상이 바뀌면 새로운 개념은 늘 생기기 마련이라, 흔히 유표적인 말을 타당하다고 여긴다. 한 예로, 산업 사회의 유물이라는 ‘장애인’을 보자. 영국 엘리자베스왕은 생활력이 없거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구빈법(1601)을 제정했다. 이를 위해 노동력이 있는 자(Ability)와 없는 자(Disability)로 나눠야 하는데, 장애인과 노인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자(Disability)로 구분되었다. 산업사회에서 신체 조건은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므로, 선한 의도를 달성하려면 ‘어쩔 수 없는 표현’으로 봤을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관점에서는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문제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공적 언어생활에 이런 유표성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국민과 소통하는 공공언어에는 특정한 것이 부각되지 않는 ‘비표지성’이 중요하다. 공적 언어에서 소수자를 차별하지 않아야 하지만, 400년 전 ‘구빈법’처럼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하는 말이 많다. 예를 들면, ‘불우이웃 돕기 성금 모금 운동’, ‘결손가정에 생필품 전달’, ‘외국인 근로자와 소외 계층을 돕는 정책’ 등이 있다. 불우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도울 수 있는데 ‘불우이웃’이라고 꼭 짚어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가짜난민, 급식충’ 등 특정 대상을 부정적 이미지로 일반화시키는 혐오표현이 함부로 쓰이는 것은 이 사회가 함께 해결할 문제다. 혐오표현의 대상이 될까봐 ‘경로석에 앉기 싫다는 우리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혐오표현에서 그 대상은 하나같이 사회적 약자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상대방에게도 이처럼 ‘유표적’으로 마음껏 말할 수 있을까? ‘조선어멈’이 그랬던 것처럼 그분들은 이 땅에 사는 우리 어머니들이고 누군가의 가족이다. 누가 누구를 혐오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