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우리에게 ‘눈과 피의 나라’로 소개된다. 영화 ‘닥터 지바고’에 등장하는 설원(雪原)과 잔혹한 혁명이 만들어낸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진정한 모습은 자연과 사건의 차원을 넘어 그것이 태동시킨 삶의 유산에서 발견된다. 문학, 음악, 발레, 미술, 건축 분야에서 거둔 예술 유산들이다. 레프 톨스토이,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일리야 레핀, 블라디미르 타틀린을 모르고 우리는 러시아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싯귀는 격변기를 살았던 우리 청년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경문(經文)과도 같았다.
러시아 예술은 ‘리얼리즘’으로 특징될 수 있다. 동토(凍土)의 혹독한 자연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극복해온 치열한 삶의 리얼리즘이다. 미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상의 외관을 묘사하는 구상화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실상을 드러내는 추상화에 이르는 경향 모두에서 발견되는 미학 원리다. ‘러시아 미술은 삶과 미술을 결코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는 어느 미술사가의 지적은 타당한 것이다. 치열한 삶의 표상으로서 리얼리즘은 12세기 러시아정교회의 이콘에서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아방가르드로 이어져 왔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1910년대와 1920년대에 러시아에서 등장한 전위적 예술 운동의 총칭이다. 때는 바야흐로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일어난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기존의 정치체계는 물론 관습과 윤리관을 송두리째 부정했다. 문학, 음악, 발레, 미술, 건축 분야의 예술가들은 혁명이 요구하는 사회변혁과 문화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유럽에서 유입된 모더니즘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하며 ‘혁명의 예술’이라는 깃발을 내세웠다.
오늘 우리는 다시 묻고 생각한다. 혁명의 예술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모든 혁명은 오로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Every revolution is only worth something if it can defend itself)’고 한 레닌의 주장처럼,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스스로를 지켜왔으며 그럼으로써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죽음으로서 열매를 맺은 미술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흥미로운 역설의 사례를 이 운동의 주역이던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에서 찾을 수 있다.
1915년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을 제작했다. 흰 바탕에 검정색 사각형 하나를 그려놓은 작품이다. 레닌은 그의 열렬한 후원자였으나 스탈린의 등장과 함께 그는 퇴폐예술가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절대주의 예술은 소비에트 연방이 내세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962년 말레비치는 부활했다. 미국인 화가 라인하르트는 ‘추상회화 No.5’를 제작했다. 이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 ‘검은 십자가’를 하나의 화면에 겹쳐놓은 형국이다. 이 미국인 화가는 말레비치가 창시한 절대주의의 세례를 받고 형이상학적 미학의 결실을 거두었다.
말레비치는 죽음으로서 밀알이 되었고 모더니즘의 생태계로부터 자양분을 받으며 미니멀아트로 부활해 20세기 미술의 신화가 되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속하는 다양한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다. 추상미술의 또 다른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도 그중 한 사람이다.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의 공통점은 ‘지금까지 재현한 적이 없었던 대상을 재현하는 것’에 있었다. 그들 조상이 남긴 러시아 이콘(성상화)의 전통이 ‘현대적 이콘’으로 불리는 추상으로 부활시켰다. 혁명의 예술은 기존에 세워진 기념비를 파괴하고 그 파괴의 순간에 창조의 최고 경지를 달성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남긴 미술의 유산은 구미지역의 모더니즘 미술로 이어지며 한국의 단색화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지구촌 시대에 한국 현대미술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는 일이 오늘 우리에게 제시된 과제다. 21세기 ‘문명사적 전환기’를 살고 있는 오늘 여기 우리들이 러시아 아방가르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