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남부 해안, 탄자니아 국경에 인접한 콸레주 시모니 마을에 사는 펨바족 어부 므왈리무 음카샤(46)씨는 이제 고기잡이를 하지 않는다. 낚시가 정부 허가를 받아야 하는 활동에 편입되면서, 신분증(ID카드)이 없는 무국적자 음카샤씨는 졸지에 '무허가 어부'가 됐다. 날로 커가는 7명의 자녀를 건사해야 하는지라 경찰에 잡혀갈 위험을 감수하긴 힘들었다. 디고족 사람들 도움으로 관광객 스킨스쿠버 체험 등을 도와 밥벌이를 이어가게 된 것만도 다행이다.
조상 대대로 생업으로 삼았던 어업을 접기란 쉽지 않았다. 자신이 나고 자란 케냐의 국적을 받기만 한다면 사업을 키우겠다는 포부가 컸기에 더욱 그랬다. 신분증이 있어야 어업 허가도 받고 은행 계좌도 만들 수 있을 텐데, 출생증명서조차 없는 음카샤씨에게 시민권 획득의 벽은 너무나도 높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국적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뼈저리게 느꼈어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케냐에서 살았지만, 그분들이 무국자였기 때문에 나도 무국적자라고 하데요."
펨바는 스와힐리어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펨바족은 케냐와 탄자니아를 자유로이 오가면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 식민 지배로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이 갈리면서 부족이 쪼개졌고 일부는 무국적자 신세가 됐다. 부족의 본거지였던 펨바섬이 탄자니아 영토로 편입되면서 탄자니아 출신 펨바족은 그 나라 시민권을 받았지만, 케냐 출신 펨바족은 어느 쪽에서도 국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국적자로 전락한 펨바족은 7,000여 명에 이른다. 1980년대 케냐 정부가 일시적으로 신분 등록을 허용했지만 문은 금세 닫혔다. 부족 갈등이 첨예한 케냐의 정치 현실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음카샤씨는 도중에 옥살이의 고초도 겪었지만 시민권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교육, 의료, 구직은 물론 이동의 자유까지 제한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그는 "무국적자로 산다는 것은 상자에 갇혀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음지에 살아야 하고, 밖으로 나갈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보호받을 수도 없다"고 호소했다.
케냐의 무국적자 문제는 펨바족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파레·누비안 등 또 다른 소수민족, 아시아·브룬디·르완다계 후손 등이 시민 자격을 얻지 못한 채 소외돼 있다. 케냐가 1963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제때 시민권 등록을 못했거나 국적법이 아우르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아프리카 식민지배 역사가 60년에 가까운 무국적 신분 대물림이란 개개인의 비극을 초래한 셈이다. 케냐 정부는 자국 내 무국적자를 3,221명으로 집계하고 있지만, 유엔난민기구(UNHCR)의 추산치는 지난달 기준 최소 1만6,000명에 달한다. 어느 쪽도 정확한 조사에 기반한 통계는 아니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만난 테니스 선수 드루브 카비아(17)군은 '성인이 되기 전 시민권을 받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두 달 전에야 풀었다.
테니스 선수 중 노박 조코비치와 로저 페더러, 한국의 정현을 좋아한다는 카비아군은 일곱 살 때 테니스를 시작한 신동이다. 열두 살이던 2016년 국제테니스연맹에서 주최한 동아프리카 주니어 챔피언십 우승을 포함해 수십 개의 상을 거머쥐었다.그가 프로 테니스 선수가 돼서 '조국' 케냐를 빛내겠다는 꿈을 갖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11세 때 국가대표에 처음 선발된 카비아군은 국제 대회 출전 과정에서 자신이 무국적자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경기를 하려면 해외에 나가야 했지만 여권을 신청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앞으로 선수로서 기회가 박탈될 거란 사실을 알고 억장이 무너졌다"며 당시의 막막했던 심정을 전했다. "해외 경기차 출국할 때 공항 심사를 통과하는 과정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내가 다른 선수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속상했고요. 집과 직업을 구하는 것부터 대학 진학, 하다 못해 은행 계좌를 개설하는 것조차 시민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 성인이 되기 전 시민권을 꼭 받고 싶었습니다."
카비아군 가족은 1850년대 인도를 떠나 케냐에 정착한 아시아계 후손이다. 당시는 인도와 케냐 모두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케냐에서 태어난 카비아군 부모는 영국 국적을 얻었다. 두 사람은 자녀에게도 당연히 영국 국적을 물려주게 될 거라고 여겼지만 오산이었다. 영국 국적법이 바뀌면서 영국 땅에서 태어나지 않은 경우엔 식민지에 부여했던 부모의 영국 국적을 이어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케냐 정부 역시 '카비아군은 케냐에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둘 다 케냐인이 아니므로 시민권을 줄 수 없다'면서 국적 부여를 거절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아들의 앞날을 걱정한 아버지 파레시 카비아(53)는 2012년 케냐에서 이중국적이 허용되자 케냐 국적을 신청했다. 자신과 부모, 조부모의 출생증명서와 노동증명서를 포함, 카비아 집안이 몇 대에 걸쳐 케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2년이 걸렸다.
어렵사리 케냐 시민권을 얻은 아버지는 본격적으로 자녀들의 국적 취득에 나섰다. 하지만 신청은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한 달에 2, 3번씩 이민국 문턱이 닳도록 방문했지만, 서류가 미비해 반려됐다는 답변을 듣는 것조차 2년이 걸렸다. 해외 일정이 생긴 아들을 위해 무국적자에게 임시로 발급해주는 여권 대용 서류를 받는 데도 두 달간 매일같이 이민국을 찾아 요청해야 했다. 6년여에 걸친 노력 끝에 카비아군과 동생은 올해 7월 케냐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무국적자는 스스로 자기 존재를 증명할 것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무국적 신분을 대물림해온 무국적자가 내놓을 수 있는 증빙서류는 애초에 없다.
케냐 소수부족 쇼나족의 일원인 노시지 듀베(21)씨는 15세 때 8년 과정 초등교육을 마치기 위한 졸업시험을 앞두고서야 자신이 무국적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시험에 응시하려면 출생증명서를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졸업시험을 보지 못하면 상급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듀베씨는 "모든 꿈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며 당시를 돌아봤다.
쇼나족 상당수는 1950년대 선교를 위해 짐바브웨에서 케냐로 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케냐 정부는 1963년 독립 이후 2년간 영주자의 시민권 등록을 허용했지만, 교통과 통신이 열악하던 시절이라 이런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듀베씨 조부모는 결국 시민권을 얻지 못했고, 쇼나족 대부분이 이런 과정을 거쳐 대대로 무국적자가 됐다. 그 탓에 쇼나족은 대부분 초등학교를 중퇴하며, 합법적인 직장을 구할 수 없어 남자는 목수, 여자는 바구니 제작에 주로 종사한다.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듀베씨는 유급을 택해 8학년을 한 해 더 다니며 길을 찾았다. 간신히 찾아낸 어머니의 산부인과 진료카드를 근거로 케냐 출생임을 입증해 겨우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학년 때 전교 1등을 하면서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출생증명서가 다시 발목을 잡았다. "출생증명서를 가짜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무국적자여서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대학 진학은 더 큰 난관이었다. 입학하려면 시민권자에게 발급되는 ID카드 사본을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듀베씨는 UNHCR과 케냐 인권위원회를 통해 고등교육을 받기 위한 신분상 제약을 완화해달라고 호소했다. 그의 사연은 케냐를 포함한 아프리카 11개국 장관 회의에서 언급될 정도로 국제적 이슈가 됐고, 케냐 명문 나이로비대는 예외를 적용해 듀베씨의 입학을 허가했다. 그의 투쟁은 더 큰 변화를 이끌어냈다. 케냐 정부가 지난해 12월 쇼나족에 대한 시민권 허용을 결정했고, 이에 따라 쇼나족 1,649명이 올해 7월 ID카드를 발급받은 것이다.
쇼나족은 이달 1일 나이로비의 우후루(스와힐리어로 '자유') 공원에 모여 시민권 획득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었다. 경제와 국제관계를 공부하면서 무국적 문제를 알리고 싶다는 듀베씨는 이 자리에서 "시민권을 얻은 날은 무국적자로 묶여있던 사슬을 푼, 새로 태어난 날"이라고 말했다. 그는 "펨바족, 르완다계 등 다른 무국적자 친구들로부터 축하를 받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어려움에 처해있다"며 "무국적자라는 말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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