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작은 미술관에서는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는지 보여주는 전시를 할 수 있어요. 앞으로 작은 미술관들이 지역 곳곳에 세워졌으면 합니다.”
지난해 말 한국 수묵 추상의 거장으로 불리는 서세옥 화백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족은 고인의 작품과 그가 모았던 작품들을 기증했다. 서 화백은 생전 자신의 작품이 대중에게 공유되길 바랐고, 유족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지난 5월 서세옥 화백의 작품 2,350점, 컬렉션 992점 등 총 3,342점을 서울 성북구에 기증했다. 현재 기증품은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기증처가 성북구인 것은 서 화백이 60년 이상 이곳에서 살았고, 성북구립미술관 명예관장을 지내는 등 성북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기증 작품의 운영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귀국한 서세옥 화백의 장남 서도호 작가는 지난 12일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기자와 만나 “아버지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 세계를 구현하는 이상적 환경을 찾았고, 소나무가 많은 성북동을 택했다”며 “대표작으로 불리는 인간 시리즈가 성북구 정착 이후 나왔을 정도로 아버지와 성북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기증을 계기로 서세옥미술관이 세워지고, 서 화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길 바랐다. “작품 하나만 가지고는 그 화가를 제대로 알 수 없어요. 기증작 중 아버지 작품이 상당히 많습니다. 실험적 시도를 했을 때의 초기작부터 스케치,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 아버지가 쓰시던 붓과 벼루 등 서세옥의 전모를 보여주는 게 다 들어가 있어요. 서세옥미술관이 생긴다면 작가의 창조적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장소인 작업실 근처에 미술관이 세워지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그는 지역에 이 같은 작은 미술관들이 계속해서 나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큰 미술관에서는 소위 ‘승자’의 작품만을 소장하게 되고, 이것만으로는 한국미술사를 포괄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올해 각 지방자치단체가 ‘이건희 컬렉션’을 유치하겠다며 각축전을 벌였는데, 제발 자기네 지역사회로 눈길을 돌렸으면 해요. 해외에는 작가의 작업실이 잘 보존돼 있고, 그 옆에 작은 미술관이 있어서 큰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습작들을 볼 수 있거든요. 지역에 있는 작은 미술관을 찾아가고 그 동네 맛집에서 음식을 먹는 게 진짜 재미 아니겠어요? 외국인들이 한국에 피카소 작품을 보러 올 것 같진 않아요.”
물론 작은 미술관이 생겨나려면 제도적 개선이 따라야 할 것이다. 서 작가는 “예산이 지역으로 분산돼 정책적으로 다양한 층위의 작가들을 포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성북구립미술관에서는 기증 이후 서세옥 컬렉션을 다룬 첫 전시인 ‘화가의 사람, 사람들’전이 진행 중(12월 5일까지)이다. ‘사람들’ 등 서세옥 화백의 대표작을 비롯해, 서화가 변관식이 서 화백에게 준 산수도, 영운 김용진이 서 화백의 결혼을 축하하며 그려준 그림 등 서 화백과 성북 지역 예술가들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걸려 있다. 서도호 작가는 “김용준이 살던 집에 김환기 부부가 살았던 이야기 등 성북동 역사뿐 아니라 그 당시 문화예술계 종사가 간에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