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업계에 반도체 수급난이 심화되고 있다. 인기 차량 출고 지연에 올해 예정했던 신차 출시 일정까지 차질을 빚고 있어서다. 자동차 업계에선 장기화 양상으로 들어간 반도체 공급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자체 개발과 생산까지 검토하고 있지만 채산성 확보 문제로 고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현대차그룹은 제네시스 ‘G90(프로젝트명 RS4)’, 기아 ‘니로(프로젝트명 SG2)’ 등 올해 4분기 선보일 예정이었던 신차 출시를 모두 내년 상반기로 연기했다. 차량용 반도체 등 주요 부품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탓에, 출시 이후 생산이 부족할 경우 돌아올 ‘신차효과’의 반감을 우려해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쏘렌토, 투싼, 카니발 등 현재 판매 중인 모델도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출고 지연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미완성된 신차 출시까지 대기 물량에 추가로 포함될 경우 인건비 등이 더해지면서 수익성만 악화된다"고 전했다.
출시 일정이 미뤄지면서 올해 경영 목표 달성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특히 제네시스 측의 피해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초대형 세단인 G90은 당초 대기업 임원인사 시기에 맞춰서 출시될 예정이었다. 가격이 비싼 고급 차량인 만큼, 개인보다 법인 구매가 많은 차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년 상반기로 출시가 연기되면서 초기 수요 확보가 힘들게 됐다. 기아도 친환경차 수요가 높아지는 시장 상황에 맞춰 ‘친환경 레저용 차량(RV)’인 니로 신형을 출시할 예정이었지만, 반도체 공급 부족으로 계획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경쟁사 상황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한국GM은 사전계약까지 마친 전기차 ‘볼트EV’를 포함해 ‘이쿼녹스’, ‘트래버스’, ‘타호’ 등 스포츠유틸리티차(SUV) 라인업의 신차 출시를 내년으로 연기했다. 쌍용자동차는 최근 유럽에 수출을 시작한 첫 번째 전기차 ‘코란도 e-모션’의 국내 출시 일정을 내년으로 미뤘다. 수입차 업체인 볼보자동차코리아도 올 연말 국내 출시 예정이었던 전기차 ‘XC40 리차지’를 내년 상반기에 출시하기로 변경했다. 다른 수입차 업체들도 출고가 지연되거나 신차 출시 연기를 검토하고 있다.
당초 올 3분기 이후 해결이 예상됐던 반도체 수급난이 길어지면서 자동차 업체들의 예상 손실도 늘어날 조짐이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알릭스파트너스’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품귀현상으로 글로벌 완성차 업체의 생산차질은 770만 대, 매출손실의 경우 연초 예상치(610억 달러)보다 3배 이상 높은 2,100억 달러(약 25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동차 업계에선 차량용 반도체의 자체 개발과 생산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실제 도요타는 최근 일본 반도체 전문기업 ‘르네사스’에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또 부품업체인 ‘덴소’와 차량용 반도체 연구개발(R&D) 합작법인 ‘마리이즈 테크놀로지’도 설립했다. GM, 포드는 미국 반도체 업체 ‘인텔’과 협력해서 차량용 반도체 물량 확보에 나섰다. 국내 기업들은 반도체 내재화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투자엔 소극적인 모습이다.
이날 호세 무뇨스 현대차 글로벌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북미권역본부장(사장)은 미국 로이터통신 등과 가진 인터뷰에서 회사 측의 공식 입장은 아니지만 “반도체 제조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현대차그룹이 직접 생산하기를 원한다”고 내부 분위기를 귀띔했다. 현대모비스는 지난해 말 현대오트론의 반도체 사업부문을 인수·합병(M&A)했지만, 아직까지 차량용 반도체의 자체 생산 계획은 없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드리) 공장의 경우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하지만, 수익성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자동차 업체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라며 “하지만 수급난이 1~2년 더 이어질 것으로 전망이 바뀌고 있어 반도체 내재화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