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거짓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유권자의 맹종 때문"

입력
2021.10.1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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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국제 현안과 외교안보 이슈를 조명합니다. 옮겨 적기보다는 관점을 가지고 바라본 세계를 전합니다.


법정에서 증인이 거짓을 말하면 위증죄로 처벌된다. 기업이 거짓광고를 해도 법적 제재를 받는다. 남양유업처럼 회사 매각까지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다른 분야보다 정치 종사자는 늘 진실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정치인은 거짓말을 해도 작은 소동만 있을 뿐 면죄부를 받는다. 거짓과 왜곡으로 이득을 취하는 행위는 엄벌하는 게 상식이나 정치인에게는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경제, 법률 소비자와 달리 정치 소비자는 보호하지 않는 것인데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영국의 트럼프’인 보리스 존슨 총리는 거짓말을 잘하는 정치인이다. 그는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영국이 매주 유럽연합(EU)에 3억5,000만 파운드를 퍼준다는 허위 주장을 폈다. 이를 믿은 유권자들이 브렉시트를 가결시키자 그는 실수였다고 발언을 철회했다.

2016년 대선에서 미국 유권자들은 주장의 70%가 거짓인 후보와 75%가 진실인 후보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선거 결과는 거짓의 승리였다. 유권자들이 선택한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대통령 취임 후 물러날 때까지 3만573번의 거짓과 왜곡 주장을 한 것으로 워싱턴포스트가 확인했다.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을 높이고, 진실을 숨겨 지지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아이나 갈레고 바로셀로나 국제학연구소 교수 등이 지난해 9월 스페인의 시장 816명을 조사한 결과, 거짓을 회피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정치인들은 재선율이 떨어졌다. 정직은 정치인의 가장 큰 덕목이지만 현실 정치에서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의 거짓에도 지지율은 집권 2년 동안 안정세를 유지했고 심지어 공화당원 77%는 그가 정직하다고 믿었다. 작년 미국 대선은 비록 결과는 달랐지만 풍경은 4년 전과 유사했다. 트럼프 후보가 창작한 진실을 믿는 수많은 유권자들에겐 조 바이든 후보에게 빼앗긴 선거였다. 존슨 총리도 의회 불법정회로 퇴임론까지 나오던 2년 전 총선에서 되레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민주주의 전통이 오래된 영국과 미국에서 거짓이 여론에 먹힌 까닭은 유권자들에게 있다. 이들은 정확한 정보를 원하기는 하지만, 거짓말에 관심이 없거나 진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지지하는 정치인의 주장이 거짓인 것을 알아도 지지 감정과 믿음까지 철회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트럼프 발언의 부정확함을 아는 것과 무관하게 그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그가 2023년 대선 출마를 저울질할 정도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지지 정치인이 거짓을 말해도 반대자가 되기보다는 거짓에 인내하거나, 그것을 진실로 믿어버린 결과다.

한국 대선에서 유력 주자들이 거짓말로 위기를 자초해도 지지율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배경 역시 같은 이유로 해석되고 있다. 대선 주자들은 제기된 의혹이나, 실언, 구설에 대해 누가 봐도 거짓인 해명을 임기응변 식으로 내놓는다. 그것마저 거짓으로 드러나면 또 다른 거짓으로 해명하지만 대선 행보에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다. 윤석열 국민의힘 경선 후보가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쓴 것을 놓고 5번이나 서로 다른 해명을 한 사태가 대표적인데 실제 그의 지지율은 큰 변화가 없었다.

카네기멜론대 올리버 할 교수팀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유권자들의 기득권층에 대한 반발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치에서 배제돼 있다고 생각하면 기득권 집단이나 엘리트층에 저항하게 되고 정직, 공정마저 기득권의 논리로 여기게 된다. 정치인의 거짓말은 기득권 반대의 표식이나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으로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구단의 팬들이 보이는 충성심처럼 정치인에 대한 지지와 발언의 정확도 사이에 상관 관계가 사라지는 연유다.

거짓말이 정치 도구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16세기에 거짓과 위선을 지도자의 덕목에 포함시켰다. 정직하도록 노력하되 진실로 인해 불이익이 초래된다면 거짓을 말해도 된다는 논리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정치에서 거짓말의 유용성을 입증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에게 거짓말은 원하지 않는 사실들을 덮는 도구이자 권좌에 오르는 수단이었다.

현실 정치가 자주 거짓말에 휩싸이는 이유에는 이를 걸러내는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 있다. 무엇보다 검증 역할을 하는 미디어 환경이 바뀌었다. 과거 정치인의 거짓말은 미디어의 확인 보도와 팩트체크로 견제되고 차단됐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퇴진을 부른 워터게이트 사건이 가능했던 데는 지금과는 다른 언론 환경도 작용했다. 닉슨은 ‘대통령이 그것을 했다면 이는 불법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거짓말을 이어갔고, 언론은 그 진위에 매달렸다.

하지만 지금 많은 유권자들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기 어려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 2016년 미국 대선 3개월 전 페이스북에서 20개의 가짜 뉴스 이야기는 20개의 진짜 뉴스 기사보다 더 많은 공유와 댓글, 반응을 얻었다.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결집하는 게 가장 중요한 정치인들이 이를 지나칠 리 없다. 거짓에 대한 대중의 무시는 거짓을 어느 때보다 효과적인 정치수단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달라진 환경이 정치에서 진실과 정직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선거에서 거짓이 횡행한다면 올바른 정보에 근거해 유권자 선택을 받는 민주주의 체계는 유지될 수 없다.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을 쓴 댄 애리얼리 듀크대 교수는 세상에는 절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1%와 어떻게든 훔치는 1%, 그리고 조건이 제대로 갖춰지면 정직한 사람이 되는 98%로 구성돼 있다고 했다. 문을 잠그는 자물쇠의 역할은 이 98%가 유혹을 느끼지 않고 정직함을 유지하도록 하는 장치라는 해석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거짓말하는 정치인은 권력의 유혹에 빠져 자물쇠를 잃어버린 사람들일 수 있다. 정치인의 거짓말이 위증이나 허위광고보다 덜 해롭다고 할 수는 없다. 정치인의 입을 규제할 수 없다면 적어도 거짓말에 지지란 보상을 해선 안 되는 이유다.

닉슨을 무너트린 워터게이트 사건만 해도 당시 공화당 당원이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는 민주당 선거사무실에 침입해 자료를 훔쳐 본 게 전부였다. 하지만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으면서 닉슨은 임기 중 첫 사임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아야 했다. 당시 사건 취재를 지휘한 워싱턴포스트의 브레들리 국장은 “닉슨은 닉슨이 잡았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인의 거짓말에 대한 대가라는 얘기다.

이태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