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정치·경제공동체 ‘유럽연합(EU)’이 위기에 처했다. 현재 EU 회원국은 27곳에 달하는데, 개별 국가들의 ‘주권 강화’ 움직임이 잇따르는 탓이다. 이미 지난해 1월 EU 품을 떠난 영국과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협정을 둘러싼 갈등이 재점화하고 있고, 극우 정권이 들어서 있는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서는 EU법과 상충되는 국내법이 속속 도입됐다. 유럽 각 나라의 내부 위기가 커질수록 EU의 권한 및 위상도 약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2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 등에 따르면, 데이비드 프로스트 영국 브렉시트 담당 장관은 이날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한 국제행사에 참석해 “EU가 브렉시트 협정을 수정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분명 ‘역사적 오판’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3일 EU의 브렉시트 협정 수정안 발표를 앞두고 선제 공격에 나선 것이다.
영국과 EU는 지난해 12월 진통 끝에 브렉시트 협정을 타결했음에도 갈등을 빚어 왔다. ‘영국령이지만 EU에 남은’ 북아일랜드에 적용된 통관 및 검역 절차를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두 지역 간 냉장육 등 식료품 통관·검역이 대폭 강화되면서 영국-EU의 이른바 ‘소시지 전쟁’이 촉발됐다.
영국의 요구 사항은 크게 △북아일랜드에서 판매되는 영국 상품에 대한 통관검사 면제 △북아일랜드 관련 분쟁에 대한 유럽사법재판소(ECJ) 결정권 철회 및 독립적 중재위원회 발족, 이렇게 두 가지다. 프로스트 장관은 이날 “북아일랜드의 평화와 번영을 지키는 건 영국 책임이며, 필요시 ‘북아일랜드 협약 제16조’를 사용할 수도 있다”며 재차 EU를 압박했다. 16조는 협약이 심각한 경제적·사회적·환경적 문제를 초래할 경우 협정 이행을 유예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일단 EU집행위원회는 ‘북아일랜드 내 영국 상품 통관검사 면제’에 대해선 그 범위를 ‘50% 이상’으로 넓히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타협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관건은 ‘북아일랜드 문제와 관련해 ECJ는 개입하지 말라’는 요구에 대한 EU의 수용 여부다. 영국은 분쟁 조정에서 ECJ 대신, 독립적 별도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EU법 위반’을 들어 EU 측이 벌금 등을 부과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EU는 “단일시장 법규를 해석하는 최상위 기관인 ECJ를 배제하는 건 전체 협정을 흔드는 문제”라며 결사 반대하는 입장이다. 다니엘 페리 EU집행위원회 대변인은 이날 “EU 단일시장에 법적 일관성과 공정한 사업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ECJ의 감독은 필수”라며 “영국의 (ECJ 철회)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전문가들은 영국 요구에 대해 “EU 영향권에서 벗어나 개별국가로서의 주권을 극대화하려는 조치”라고 분석하고 있다. 케이티 헤이워드 벨파스트 퀸스대 정치사회학 교수는 “영국이 EU와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자국 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브렉시트 협정 수정안을 강력히 밀어붙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EU의 정치 통합도 흔들리는 모습이다. 극우 세력이 집권한 폴란드와 헝가리가 잇달아 EU법에 반하는 조치를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 헌법재판소는 최근 자국의 사법개혁안에 대해 ECJ가 ‘EU법에 반한다’고 판결하자 “폴란드 헌법이 EU법에 우선한다”면서 반기를 들었다. 일각에서는 ‘폴렉시트(Polexit·폴란드의 EU 탈퇴)’ 가능성마저 거론된다.
헝가리도 18세 이하 미성년자 대상 영화·광고 등에서 동성애 묘사를 금지하는 법안을 최근 마련했는데, 이는 EU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알렉스 스체르비악 영국 서섹스대 교수는 “폴란드-EU의 갈등은 개별국 주권과 EU 통합 의지 간의 충돌”이라며 “특히 각 회원국의 내부 경제적·정치적 위기가 심화하면, 주권 강화 의지가 강해지면서 EU와의 충돌도 불가피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