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의 아파트에서 스토킹하던 여성을 포함한 일가족 3명을 살해한 김태현(25)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김씨가 세 모녀를 계획적으로 살해했다고 판단하면서도 검찰이 구형한 사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방청석에 있던 유족들은 재판부가 극형을 내리지 않은 데 항의하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서울북부지법 형사합의13부(부장 오권철)는 12일 오전 11시 살인·절도·특수주거침입 등 5개 혐의로 구속 기소된 김씨에 대한 선고공판을 열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씨는 온라인 게임에서 만난 A씨가 연락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스토킹을 하다가 올해 3월 23일 집으로 찾아가 미리 준비한 흉기로 A씨의 여동생과 어머니, A씨를 차례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김씨가 A씨 외에 다른 가족도 계획적으로 살해했는지 여부였다. 검찰은 김씨가 A씨가 퇴근하기 전 피해자 집을 찾아가 무방비 상태였던 동생을 찌르고 뒤이어 들어온 어머니까지 곧바로 살해한 점을 들어 애초 A씨 가족 전체가 범행 대상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씨는 A씨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 것은 인정하지만, A씨 가족 구성을 몰랐고 여동생은 제압만 하려 했을 뿐이라며 우발적 범행을 주장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세 모녀 모두 계획적으로 살해했다고 봤다. 김씨가 청테이프 등 미리 준비해간 도구만으로 가족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고 보기 어렵고 △여동생이 반항하자 흉기로 급소를 찌른 점 △여동생 살해 뒤 사건 장소에서 머물다가 어머니에게도 범행한 점 등이 판단 근거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계획에 흉기로 위협해 가족들을 제압하되 여의치 않으면 살해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다만 검찰 구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 부장판사는 "피고인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은 어찌 보면 당연할 수 있지만, 법원은 형벌의 특수성 및 엄격성, 양형 형평성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사형에 처해 생명 자체를 박탈할 수 있는 객관적 사정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범행을 대부분 인정한 점 △벌금형을 초과한 범죄 전력이 없는 점 △도주하지 않은 점 △반성문을 제출한 점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죄의 뜻을 밝힌 점도 고려했다고 밝혔다.
이날 공판엔 유족 15명이 참석했다. 대부분 긴장한 표정으로, 일부는 눈물을 훔치면서 개정을 기다린 이들은 재판부가 김씨를 무기징역에 처한다는 주문을 읽자 통곡하기 시작했다. 한 유족은 "안 돼요! 사형해야 해요! 재판관님 간곡히 부탁할게요"라고 외쳤고, 또 다른 유족은 "5명을 죽이면 (사형이) 되겠느냐. 내가 죽겠다"며 재판부를 비난했다. 공판 검사를 붙들고 "산 사람만 인권이 있느냐. 감형받고 나오면 또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법이 어디 있냐"면서 호소하는 유족도 있었다.
김씨는 누런색 수의에 투명 페이스실드(얼굴 가리개), 비닐장갑, 마스크를 착용하고 재판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목에는 사건 당시 자해로 생긴 상처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재판이 끝나자 김씨는 선고에 항의하는 피해자 유족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퇴정했다.
유족들은 재판 종료 후 취재진에게 항소 계획을 밝혔다. A씨의 고모는 "단란한 가정이 살인범에 의해 사라졌는데 재판부에서 무기징역을 내리는 것이 올바른 법이냐"라면서 "법이 존재하는 한 항소할 것이며, 그것이 억울하게 죽은 고인들을 위해 할 일"이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인터넷을 통해 김씨의 엄벌을 탄원하는 서명을 받겠다고 밝혔다.
김씨 변호인은 "양형에 참작될 사유들은 어느 정도 반영됐지만, 재판 내내 주장한 우발적 살해 부분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다"면서 "판결문을 검토한 뒤 피고인과 접견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