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나가는 보수주의에 닥친 역풍… 우경화에 저항 불붙은 유럽

입력
2021.10.12 22:00
17면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 퇴진… "보수 치명타"
獨·체코·노르웨이에선 중도좌파의 총선 승리
폴렉시트 반대 시위·이탈리아 극우단체 역풍
코로나19로 복지문제 대두… 포퓰리즘에 반기

10여 년간 유럽을 휩쓴 ‘보수주의 광풍’이 거센 역풍에 맞닥뜨렸다. 독일, 노르웨이, 체코 등에선 우파 정당이 선거에서 참패하며 위기를 맞았고, 이탈리아에선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극우 정치집단을 퇴출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보수층의 부패, 권위주의 정치, 과격한 선동에 환멸을 느낀 시민들의 저항도 불붙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민생과 복지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면서 유럽 포퓰리즘에 대한 반감이 터져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오스트리아에선 11일(현지시간) 외무장관 출신 알렉산더 샬렌베르크 신임 총리가 취임했다. 제바스티안 쿠르츠 전 총리가 부패 혐의로 자진 사임한 지 이틀 만이다. 쿠르츠 전 총리는 2017년 31세 나이로 총리에 올라 ‘전 세계 최연소 정치 지도자’ 수식을 얻은 스타 정치인이다. 소속 정당인 국민당은 중도우파로 분류되지만, 쿠르츠 전 총리는 극우 성향 자유당과 연립정부를 꾸리고 반(反)난민 정책을 펴는 등 극우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는 “유럽 보수주의자들은 쿠르츠를 보수의 가치를 대변하는 롤 모델로 여겼다”며 “쿠르츠의 몰락은 보수 진영에 크나큰 타격”이라고 평했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다. 각국 선거에서도 반보수주의 경향이 뚜렷하다. 체코에서는 동유럽의 대표적 포퓰리스트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가 이끄는 긍정당이 9일 총선에서 야당 연합에 패했다. 지난달 26일 독일 총선에서도 중도좌파 사회민주당(득표율 25.7%)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당ㆍ기독사회당 연합(24.1%)을 꺾는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기민ㆍ기사당 연합이 30% 이하 득표를 기록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앞서 노르웨이에서도 지난달 13일 총선을 통해 중도좌파 연합이 정권 교체를 이뤘다. 북유럽 5개국(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에 좌파 정권이 동시에 들어선 건 1959년 이후 처음이다.

2010년대 초 유럽 보수세력은 난민에 대한 반감을 등에 업고 약진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생존 문제가 대두되며 백신 접종 의무화, 복지 지출 확대 정책 등이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됐다. 우파보다 좌파가 주도해 온 의제들이다. 우파 안에서는 코로나19 봉쇄 문제, 백신 접종 의무화 등을 두고 논쟁이 격화하며 세력이 갈라졌다. 전문가들은 최근 유럽 우경화에 대한 반작용이 이러한 흐름 위에 놓여 있다고 본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중도좌파의 재기라고 단정하는 건 시기상조”라면서도 “지난 10년간 지배적 경향이었던 민족주의와 포퓰리스트 우파의 권위주의 정치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풀뿌리 운동도 거세지고 있다. 폴란드에선 10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열렸다. 수도 바르샤바에서만 10만 명이 운집했다. 폴란드의 유럽연합(EU) 탈퇴, 즉 ‘폴렉시트(Polexit)’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여당인 극우 포퓰리즘 성향 법과정의당이 법관 인선 권한을 가진 국가사법위원회 위원 일부를 법무장관이 지명할 수 있도록 하자, EU는 사법부 독립권 침해를 이유로 폴란드 정부에 제동을 걸어 양측 간 대립이 첨예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최근 폴란드 헌법재판소가 “폴란드 헌법이 EU법보다 우선한다”고 결정하면서 사실상 폴렉시트를 위한 단초가 마련됐다. 시민들은 “여당이 EU와 맞서며 폴란드 미래를 위협한다”고 맞섰다.

이탈리아에서도 시민단체와 정치권을 중심으로 극우단체 해산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접종 증명서인 ‘그린 패스’ 도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9일 이탈리아노동총연맹 본부 건물에 난입해 집기를 부수고, 시위 참가자가 치료받던 병원 응급실에서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등 도심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탓이다. 이탈리아 치안당국은 네오파시즘을 추종하는 극우 정치단체 ‘포르차 누오바’를 배후로 보고 있다. 중도좌파 성향 민주당은 11일 파시스트 정당 재조직화를 금지한 헌법에 따라 정부가 관련 정당 해산 절차에 착수해야 한다는 동의안을 상ㆍ하원에 각각 제출했다. 원내 제1당인 반체제 정당 ‘오성운동’ 대표인 주세페 콘테 전 총리도 동의안에 서명한 뒤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폭력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표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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