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시다 후미오 내각이 ‘성장보다 분배’를 강조하고 수십 조엔 규모의 재정 정책을 예고하면서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입지를 뒤흔들고 있다. 이달 31일 중의원 선거(총선)를 앞두고 야당은 당혹스러워 하며 자신들의 화두를 빼앗긴 데 대해 차별화 방안을 고심하는 모습이다. ‘아베노믹스’로 주가는 올랐지만 국민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은 일본에서 여론은 일단 정치권의 분배 정책 경쟁에 기대를 걸고 있다. 하지만 시장에선 성장보다 분배를 우선시하는 기조에 대해, 재정건전성을 중시하는 재무성에선 대규모 재정 투입이나 감세 공약에 대해 각각 우려가 제기된다.
입헌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 대표는 11일 중의원에서 열린 각 당 대표 질문에서 기시다 총리에게 “총리가 말하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란 것은 아베 전 총리 때도 말했던 것이고 애당초 일반론에 지나지 않아 지금의 일본엔 해당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기시다 총리가 분배를 강조하며 ‘새로운 자본주의’를 내세웠지만 말만 거창할 뿐 내용이 없다고 공격한 것이다. 분배를 강조한 기시다 정권과 경제정책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야 경제 정책에 원전 등 에너지 정책을 제외하면 별 차이가 없는 게 사실이다. 기시다 총리는 총재 선거 때부터 ‘아베노믹스의 과실이 기업에만 돌아갔다’며 임금 인상 등을 통해 개인에게 ‘분배하지 않으면 다음의 성장은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아베노믹스를 비판하면서 ‘분배가 있어야 성장이 있다’고 외쳤던 야당의 주장과 거의 일치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타격을 받은 비정규 노동자나 아이를 키우는 가정, 사업자에 대해 골고루 지원금을 준다는 정책이나 간호사, 보육교사 등 돌봄 노동자에 대한 임금 인상과 증원 등 구체적인 방안도 야당이 제시했던 것과 흡사하다.
심지어 ‘새로운 자본주의’의 재원으로 검토하겠다는 금융소득세 인상안 역시 야당이 주장해 왔던 것이다. 사실 입헌민주당은 아베 신조 전 정권 당시 자기들이야말로 자민당 ‘보수 본류’로 불리는 “고치카이(宏池会)적 흐름”이라고 주장해 왔는데, 실제 고치카이 파벌의 수장이 총리가 됐으니 경제정책이 비슷해지는 건 필연적이란 분석도 있다.
일본의 여야가 함께 분배 정책과 금융소득세 인상 등을 거론하자 일각에선 비판도 제기된다. 라쿠텐 그룹의 미키타니 히로시 회장은 트위터를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사회주의’밖에 들리지 않는다”면서 금융소득세 인상론을 겨냥해 “금융시장을 붕괴시키고 어떻게 할 것인가.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냐”고 강하게 비난했다. 금융소득세 인상 검토에 대한 비판 수위가 높아지고 8일 연속 도쿄증시가 하락하며 ‘기시다 쇼크’란 말이 나오자 기시다 총리도 10일 “(금융소득세는) 당분간 손대지 않겠다”고 물러섰다.
비판은 재무성 사무차관의 입에서도 나왔다. 총선을 앞둔 여야가 모두 분배를 강조하고 대규모 재정 투입이 필요한 공약을 내세우자 야노 고지 재무성 사무차관이 ‘분게이슌주(文藝春秋)’ 11월호에 이를 ‘퍼주기 싸움’으로 규정하고 “이대로 가면 국가 재정이 파탄 난다”고 기고하며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사무차관은 관료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직위로, 현직 재무성 관료가 새로 출범한 자민당 정부의 정책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야노 사무차관은 일본의 GDP 대비 정부 채무 비율이 256.2%라는 점을 지적하며 “지금 일본의 상황은 타이태닉호가 빙산(국가 채무)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셈인데, 이 거대한 빙산을 더 크게 만들면서 항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에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정조회장은 10일 NHK 방송에 출연해 “바보 같은 이야기”라며 “매우 무례한 말투”라고 직접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했다. 기시다 총리는 같은 날 후지TV 방송에서 “여러 논의가 있는 것은 좋지만,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관계자는 단단히 협력해야 한다”고 못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