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게 가난했던 '소년공' 이재명, '깡'으로 청와대 문턱에 이르다

입력
2021.10.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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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대선후보 이재명 라이프스토리]


만독불침(萬毒不侵). ‘만 가지 독에도 당하지 않는다’는 무협소설 용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스스로를 빗대는 말이기도 하다. 쉰여덟 해를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독을 맞닥뜨렸지만, 지지 않고 극복해 왔다는 의미다. 2018년 11월, 그는 그해 6월 지방선거를 달군 이른바 ‘여배우 스캔들’을 겨냥해 “나는 적진에서 날아온 탄환과 포탄을 모아 부자가 되고 이긴 사람이다. 만독불침의 경지에 있다”고 했다. 부당한 공세에 굴하지 않고 위기를 기회로 활용했다는 자가진단이었다.

이 후보의 말마따나 소년 노동자 출신 무(無)수저가 집권여당의 대표선수로 대선에 출마하기까지, 그는 숱한 우여곡절을 딛고 대권 도전 출발선에 섰다. 과감한 판단과 저돌적 추진력, 거침 없는 사이다 발언. 이재명의 정체성은 굴곡을 지날 때마다 더 선명해지고 단단해졌다.

①'공장 관리자'를 꿈꾼 무명의 소년공

‘가난’은 어린 이재명의 숙명이었다. 그래서 ‘흙수저’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니지만, 자신은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라 칭한다. 가난의 굴레가 그만큼 강하게 유년 시절을 옥죄었다는 뜻일 게다.

이 후보는 1963년(호적상 1964년) 경북 영양과 봉화, 안동군이 만나는 산골 마을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그의 삶은 흙수저 레퍼토리를 그대로 따른다. 자식들 건사는 노름을 즐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몫이었다. 매일 왕복 10㎞ 산길을 홀로 걸어 초등학교에 다녔고, 개천을 여럿 건너야 하는 탓에 비가 오면 등교하지 못하는 날도 잦았다. 결석이 많아 매도 자주 맞았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쯤 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땅까지 노름으로 날리면서 어머니, 형제들과 경기 성남시로 터전을 옮겼다. 먼저 떠난 누나 둘을 제외한 여덟 식구의 단칸방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중학교 진학도 당연히 언감생심이었다. 당장 밥벌이가 급했던 터라 생계 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 형 이름을 빌려 위장취업을 하고 성남 공단 곳곳을 전전했다. 여섯 번째로 취업한 야구글러브 공장에서는 프레스에 왼쪽 손목 관절이 눌리는 사고를 당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생활에 치료는 그림의 떡이었다. 왼팔은 손목이 뒤틀린 채 자랐고 6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살인적 노동은 소년이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그래서 ‘공장 관리자’가 돼 이 지옥을 탈출하자고 마음먹었다. 당시 관리자 중에 고졸이 많아 ‘고교졸업 자격증만 있으면 되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중ㆍ고교 검정고시를 수월하게 통과하자 자신감이 붙었다. 내친김에 대입에도 도전장을 냈다. 마침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4년 장학금을 주는 대학이 생겼고, 매일 두 시간만 자는 강행군 끝에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금과 3년 치 등록금 면제, 매달 20만 원의 용돈을 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그의 월급은 8만원. 인생 역전의 희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②47초 만에 좌초한 공공의료원, 정치로 이끌다

장애인이라 취업이 힘들 거라 여기고 일찌감치 사법고시에 승부를 걸었다. 생명줄과 같았던 대학생 신분을 유지한 채 고시공부에 매달렸다. 그리고 4학년이던 1986년, 두 번째 도전 만에 합격증을 손에 쥐며 청년 이재명의 삶의 경로는 확 달라졌다.

이 후보의 사법연수원 성적은 상위 30% 안팎으로 꽤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출세 길을 보장하는 판사나 검사 대신 변호사를 택했다. 연수원 시절 접한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이 계기였다. 부산에서 유명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 판검사가 아니어도 먹고살고, 공익도 추구할 수 있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1989년 이 후보는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주로 노동ㆍ인권 사건을 맡아 변호했다. ‘성남시민모임’을 창립해 시민운동에 뛰어든 것도 이즈음이다. ‘백궁ㆍ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과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을 파헤쳤다. 성남 구시가지 대형병원들이 문을 닫으며 의료공백이 심각해진 2004년 성남 공공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시민 2만 명의 뜻을 모아 주민 발의 조례를 만들었다. 하지만 시의회에서 47초 만에 날치기 부결됐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30대 변호사는 그저 오열만 했다. 이 후보는 “방청하던 시민들과 항의하다가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수배됐다. 전과 중 하나가 이때 생겼다”며 “성남시의료원은 제가 정치를 결심한 이유”라고 했다.

정치인 이재명의 출발도 순탄치 않았다. 2006년 호기롭게 성남시장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2년 뒤 18대 총선 땐 성남 분당갑 전략공천을 받았으나 또 상대 후보에 밀렸다. 이 후보는 삼수 끝에 2010년 지방선거에서 51.2%의 넉넉한 득표율로 마침내 성남시장에 선출됐다.

행정가 이재명의 위기관리 능력은 빛을 발했다. 당선 당시 성남시는 부채만 7,285억 원에 달하던 부실 지자체였다. 위기 타파의 첫 결단은 지방정부 최초의 채무지급유예(모라토리엄) 선언이었다. 이후 3년 6개월간 현금 4,572억 원을 갚고, 나머지 부채는 회계 내 자산 매각 등으로 정리했다. 막대한 빚을 청산하는 와중에도 시 복지예산 비중을 26%에서 36%로 늘린 것은 그가 지금도 자랑하는 업적 중 하나다. 그리고 2013년, 9년 동안 그의 가슴 한편을 짓눌러 왔던 시립의료원의 첫 삽을 떴다.

③"박근혜 하야" 가장 먼저 외친 사이다

2014년 성남시장에 다시 뽑혔다. 이듬해 3대 무상복지 사업(청년배당ㆍ무상산후조리지원ㆍ무상교복)을 시작하며 대선 대표공약인 ‘기본 시리즈’ 토대를 다듬었다. 박근혜 정부와 사사건건 부딪히던 이 후보는 2016년 6월 지방자치를 무력화하려는 중앙정부에 항의하며 11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그해 10월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자 정치인 중 맨 처음 박 전 대통령 하야를 주장했다. 대중은 이런 돌직구 행보에 열광했다. 곧 그에게는 사이다란 별칭이 따라다녔다.

실패로 끝났지만 이 후보는 높아진 인기를 무기 삼아 2017년 19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다. 득실은 뚜렷했다. 광역단체장도 아닌 기초자치단체장의 대담한 도전은 정치인 이재명의 인지도를 전국구로 끌어올렸다. 동시에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친(親)문재인계와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당시 유력 후보였던 문재인 대통령을 거칠게 몰아붙인 데 대해 그는 훗날 “좀 싸가지가 없었던 것 같다”며 여러 번 후회했다.

차기 대권을 향한 진군은 멈추지 않았다. 2018년 3월 성남시장을 사퇴하고 경기지사에 도전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문 대통령과 상대 후보 전해철 의원 등을 공격한 ‘혜경궁 김씨’(SNS 계정 주인)가 부인 김혜경씨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본선에서는 이른바 ‘형수 욕설’과 여배우 스캔들이 야권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 후보는 이번에도 만독을 이겨냈다. 민주당계 출신으로 20년 만에 최대 지자체 경기도의 수장이 됐다. 지사 재임 기간 기본소득제 도입을 추진하는 등 기본시리즈 실험을 구체화하며 차근차근 정책 곳간을 채워 갔다.

④소신과 포퓰리즘 사이... 대권 도전기의 결말은?

이 후보의 장기인 추진력은 도정에서도 도드라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지침에 협조하지 않는 신천지 교단에 강제 역학조사를 지시하는가 하면, 계곡마다 들어차 있던 불법 시설물을 전부 들어냈다. 또 국민들의 경제적 부담이 커지자 선별 지급이란 당정 입장과 반대로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주장했다. 누구는 ‘소신’이라 칭찬했고, 다른 누구는 ‘포퓰리즘’으로 비난하는 등 양 갈래 평가는 여전했다.

지난해 7월 ‘친형 강제입원’ 관련 허위 사실 공표 혐의를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면서 이 후보는 대권 재도전을 위한 족쇄를 완전히 벗었다. 이후 여권 대선후보 지지율 1위 자리를 한 차례도 내주지 않았다. 경선 막판 이 후보를 겨눈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도 대세론을 뛰어넘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선후보 이재명은 이제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길, 그래서 불확실성과 변수가 넘쳐나는 험로에 발을 딛으려 한다. “위기에 더 강하다”는 그의 자신감은 마지막 시험대에서도 통할 수 있을까.

이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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