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크뤼(Grand Cru)’는 ‘뛰어난 포도밭’을 뜻하는 말이다. 우수한 와인에 이 명칭이 부여된다. 보르도 와인과 부르고뉴 와인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드물지만 루아르 와인에도 그랑크뤼가 있다.
말 자체도 어려운 그랑크뤼는 사실 복잡하기 그지없다. 부르고뉴와 루아르는 ‘포도밭’에 그랑크뤼 등급을 부여했다. (루아르 지역의 캬르 드 숌도 2010년산부터 그랑크뤼가 되었다.) 당연히 그랑크뤼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의 등급 또한 ‘그랑크뤼’다.
의미가 다르지만 샴페인의 고장 샹파뉴에도 그랑크뤼가 있다. 샹파뉴에서는 주로 구매한 포도로 와인을 빚는다. 이 때문에 ‘마을’에 등급을 매겨 포도값 기준을 정한다. 따라서 샴페인의 그랑크뤼는 와인 등급이 아니다. 정해진 포도값의 100%를 받을 수 있는 그랑크뤼 마을의 포도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보르도에서는 ‘샤토(와이너리)’에 그랑크뤼를 부여했다. 보르도 와인을 좀 더 자세히 보면, 그랑크뤼 뒤에 ‘클라세’를 붙여 ‘그랑크뤼클라세’라 한다. 그랑크뤼에 등급을 매겼다는 뜻이다.
그랑크뤼클라세 1855(Grands Crus Classés en 1855).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다섯 등급으로 분류한 레드 와인 61종, 그리고 특등급 1종과 두 등급으로 분류한 화이트 와인 25종으로 구성된 보르도 좌안의 등급 체계다. 1855년에 만들어진 이래로 지금까지 167년간 거의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랑크뤼클라세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17세기 중반에 이른다. 습지였던 보르도 메독 지구에 물이 빠지자 당시 오브리옹의 성공을 목격한 라피트, 마고, 라투르, 무통(당시는 모통)도 이 지역에서 와인을 생산했다. 1710년대에 이들 와인은 일반 와인보다 두세 배 비싼 가격으로 유통되며 오브리옹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불과 몇십 년 만에 보르도 대표 와인으로 우뚝 올라선 것이다. 다만 오브리옹, 라피트, 라투르, 마고는 가격이 비슷했고, 무통은 조금 낮은 가격에 거래됐다고 한다. 시장에서 와인 서열이 정해지고 있었다.
18세기 말 프랑스 전역을 휩쓸고 간 프랑스 대혁명은 와인 산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포도밭을 만들 수 있는 1731년 법령이 혁명으로 폐기됐고, 세제가 개편되었다. 프랑스 전역에 포도밭이 늘기 시작했다. 와인 시장도 덩달아 활발해졌다.
그런데 보르도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온건파인 지롱드당에 와이너리를 소유한 귀족이 많은 때문이었다. 혁명의 불길 속에 이들이 처벌당했다. 라피트 와이너리 소유주는 단두대에서 사형을 당했다. 살아남은 와이너리도 높은 세금 압박을 받았다. 몰수되거나 경매로 나오는 와이너리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새 세상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은 사람들을 달뜨게 했다. 이렇듯 격변하는 시대에는 지침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1815년 보르도에서 대를 이어 중개상(Courtier)을 하던 기욤 로통은 와인 가격과 평판을 취합해 와인 등급표를 만들었다. 그는 와인 4종(라피트, 라투르, 마고, 오브리옹)을 1등급에 올렸다.
등급을 언급한 이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1723년 영국의 한 수입상도 와인 4종이 특별하다는 기록을 남겼다. 1787년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또한 와인 4종이 훌륭하다는 시음 평을 남겼다. 이렇게 누적된 평가는 와인 가격뿐만 아니라 포도밭 가격에도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가 그러하듯, 혁명이 지나간 보르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꿈틀댔다. 보르도 메독 지구에서는 부유한 상인이나 신흥 귀족이 경매로 나온 와이너리를 속속 인수했다. 이들은 샤토를 짓고 양조 시설을 확충했다.
‘샤토(Château)’는 ‘성(城)’을 뜻한다. 그런데 이들이 세운 샤토는 ‘와이너리 저택’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신흥 자본가였기에 귀족 가문의 ‘유서 깊은 성’처럼 자신들의 ‘새로운 저택’에 역사와 전통을 불어넣고 싶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샤토는 곧 와이너리를 의미했다. 세간에 1등급으로 오르내리던 라피트, 라투르, 마고, 오브리옹 이름 앞에도 이윽고 샤토가 붙었다.
한편 1853년 나다니엘 드 로칠드 남작이 ‘브란느 무통’ 와이너리를 인수했다. ‘샤토 (브란느) 무통 로칠드’가 탄생한 것이다. 이즈음 무통 와인의 가격은 당시 최고급 와인으로 인정받던 샤토 라피트(1868년 제임스 마이어 드 로칠드가 인수하기 전까지의 이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나다니엘 남작이 무통을 인수하기 전인 1851년, 영국 런던의 크리스털궁에서 제1회 만국박람회가 열렸다.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치러진 국제 행사였다. 이에 자극받은 나폴레옹 3세는 파리에 이 박람회를 유치했다. 와인의 나라 프랑스 황제답게 프랑스 와인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싶어 했다. 마침내 1855년 5월 15일부터 11월 15일까지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산업궁에서 농산물, 공산품, 공예품을 전시하는 박람회가 열렸다.
나폴레옹 3세는 박람회를 잘 치러 영국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라고 해도 뭐든 다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 파리박람회는 적자가 났다고 한다. 그런데도 와인의 역사에는 큰 족적을 남겼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등급 체계인 그랑크뤼클라세 1855가 이때 만들어졌다.
파리박람회 때로 돌아가 보자. 박람회 개최가 확정되자 보르도시를 관할하는 지롱드 도청에 ‘지롱드를 대표하는 고급 와인을 보내달라’는 공문이 전달된다. 박람회에 전시할 품목이었다. 지롱드 도청은 지롱드 상공회의소에 이를 위임했고, 곧 보르도 시장을 위원장으로 전문가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보르도 전설’을 쓴 제인 앤슨에 따르면, 애초 조직위원회에서는 와인을 레이블로 구분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보르도 시장은 샤토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당연히 지도가 있으면 재미도 있을 터, 아이디어는 다른 아이디어를 낳았다. ‘지도에 등급별로 표시하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는 1855년 4월 5일 와인중개인협회에 와인 목록을 등급별로 작성해달라고 요청했다. 박람회 개막일이 40일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와인중개인협회에서는 레드 와인 57종을 1~5등급으로 나누고, 화이트 와인 21종을 특등급 1종에 나머지를 1~2등급으로 분류한 목록을 작성했다. 이들은 13일 만에 완성한 이 목록을 지롱드 상공회의소에 전달했다.
유일하게 특등급(Premier Cru Supérieur)을 받은 와인은 화이트 와인으로, 소테른 마을의 샤토 디켐이다. 레드 와인 1등급은 오랫동안 최상급으로 유통된 와인 4종(라피트, 라투르, 마고, 오브리옹)이었다. 당시 급부상한 무통 로칠드는 2등급의 첫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이렇듯 그랑크뤼클라세 1855는 만들어지는 과정이 부산했다. 보르도 지역 전체 와인을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었던 탓에 지금까지도 공정성에 물음표가 붙는다. 다만 시장을 통해 누적된 데이터, 즉 150~200년 전부터 거래된 와인 가격과 평판을 토대로 만들어진 비공식 등급 체계가 존재했기에 짧은 기간에 등급을 매길 수 있었다.
급하게 만들어지기도 했거니와 ‘행사용’이었기 때문에, 모두 머지않아 이 등급 체계가 바뀔 거라고 여긴 듯하다. 나다니엘 남작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겨 당시 1등급에 오르지 못한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1등급은 될 수 없었고, 2등급은 내가 거부한다. 나는 무통일 뿐이다.” 또 위원회의 실수로 목록에서 누락된 샤토 캉트메를르가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 그해 말 5등급에 이름을 올렸다. 레드 와인이 58종으로 수정되었다.
한편 샤토 무통 로칠드는 1855년의 치욕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이들은 1등급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여러 박람회에 출품해 대상을 거머쥐었다. 1924년엔 샤토 내 주병(와이너리에서 직접 와인을 병에 담는 것)을 최초로 도입했다. 레이블에 미술 작품을 사용하는 등 파격도 꾀했다.
마침내 1973년 무통 로칠드가 1등급으로 승급했다. 그랑크뤼클라세 1855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이를 기념해 1973년산 샤토 무통 로칠드 와인엔 그해 영면한 피카소의 그림 ‘바카날(Bacchanale)’이 인쇄된 레이블이 붙었다. 레이블에는 이렇게 적혔다. “나는 1등급이다. 나는 2등급이었다. 무통은 변하지 않는다.”
서두에 소개했듯, 1855년 당시 58종이던 레드 와인이 지금은 61종이다(화이트 와인은 현재 26종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상속이나 매매를 통해 샤토가 분할되고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사이 포도밭을 확장한 샤토도 여러 곳이다. 1855년에 비추면 현재 샤토 4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샤토의 소유주가 바뀌었다.
분명 와인 등급 체계는 여타 와인과 구별해 품질을 보전하기 위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실제로 그랑크뤼 샤토들은 명성과 전통을 잇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도 ‘변한’ 샤토가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슈퍼 세컨드’라 불리는 와인이 있다. 등급이 낮은 와인이 등급이 높은 와인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을 때 칭하는 말이다. 2등급 와인에는 이런 경우가 꽤 많다. 3등급 샤토 팔머, 5등급 샤토 린치 바주나 샤토 퐁테카네 같은 와인도 그러하다.
이런 사정을 보면 등급 체계가 바뀔 만도 하다. 실제 등급을 조정하려는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당시 등급에 들지 못했거나 후발로 시작한 메독 지역의 샤토는 ‘크뤼 부르주아’ 등급을 따로 만들었다. 보르도 지역임에도 그라브와 생테밀리옹에는 다른 그랑크뤼클라세가 있다. 로버트 파커 같은 평론가도 자체 등급표를 만들어 발표한다.
그런데도 그랑크뤼클라세 1855는 아직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랑크뤼클라세 1855 와인 이름 앞에 모두 ‘샤토’가 붙은 걸 보면, 이 체계는 과연 무너지지 않는 ‘성’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성 밖에는 제각각 맛과 향이 다른 수많은 와인, 그리고 그만큼 입맛이 다른 수많은 사람이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