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르와 함께 볼티모어로 떠났다

입력
2021.10.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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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볼티모어

편집자주

부부 소설가인 강보라 박세회 작가가 동네에 얽힌 사회 문화적 단편을 감성적 필치로 담아냅니다.

오마르와 함께 볼티모어로 떠났다.

오마르가 죽었다. 물론 HBO의 드라마 ‘더 와이어’의 샷건 강도 오마르 리틀은 2008년에 방영한 다섯 번째 시즌 여덟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미 죽었다. 오마르를 연기한 배우 마이클 윌리엄스가 죽었다. 드라마에서 마약 파는 갱단만 골라 강도질해 ‘도심의 로빈 후드’라 불리던 오마르는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캐릭터였다. 눈에 안 띄는 피스톨이나 리볼버 대신 트렌치 코트에 미처 숨겨지지도 않는 거대한 샷건을 질질 끌고 다닐 만큼 마초적인 흑인 범죄자였으면서도, 자신의 애인에겐 한없이 다정하고 때론 감성 넘치는 게이였다. 이 캐릭터로 ‘더 와이어’는 미국 사회, 특히 마초적 흑인 커뮤니티에 만연한 동성애자에 대한 단단한 혐오와 편견에 균열을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마르를 연기한 배우 마이클 윌리엄스도 만만치 않게 특이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한때 조지 마이클과 마돈나의 백그라운드 댄서로 섰고, 크리스탈 워터스의 ‘100% 퓨어 러브’ 안무를 맡았을 정도로 춤에 진심인 안무가였다. 뉴욕 퀸스의 한 바에서 자신의 스물다섯 살 생일을 축하하던 중 싸움이 벌어졌고, 한 남자가 면도날로 그의 얼굴을 그었다. 이마부터 콧등까지 이어지는 상흔이 남았다. 그 상처 탓에 아무도 그를 무대로 불러주지 않아 연기자로 전향했고, 아마도 그 상처 덕에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리즈’로 꼽히는 ‘더 와이어’에 캐스팅되었을 것이다. 샷건 치고는 좀 짤뚱한 ‘모스버그 500 크루저’를 휘두르며 동네 갱단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아니, 그런 역할을 맡았던 배우는 9월 8일에 자택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죽었다. 그가 평안히 잠들기를 바랐다.


나는 그날 구글 지도를 타고 볼티모어로 여행을 떠났다. ‘더 와이어’의 배경인 볼티모어에서 오마르의 향기라도 느껴볼 심산이었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다. 굳이 검색을 하지 않더라도 볼티모어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두 도시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 수도인 워싱턴D.C.와 뉴욕을 선으로 연결하면 그 사이에 볼티모어와 필라델피아가 순서대로 끼어 있다. 웨스트 볼티모어 어딘가에 마우스 커서를 올리고 두리번거렸다. 드루이드 힐 애비뉴와 웨스트 프레스턴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곳 근처에서 커서를 어슬렁거릴 때 뭔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한 주거 단지에 ‘더 피트’(the pit)라는 깃발이 꽂혀 있었다.

피트는 드라마에서 마약 중독자들이 모여 사는 저층 빈민 주거 지구를 일컫는 말이다. 블록 전체를 에워싼 저층 건물들의 한복판, 하늘에서 보면 구덩이처럼 쏙 들어간 모양으로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그곳에서 10대 볼티모어 갱들이 동네 부랑자와 피트 주민들에게 마약을 판다. 정신이 반쯤 나간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아이들에게 구겨진 지폐를 들이밀며 하얀 가루를 구걸한다. 약쟁이 아줌마 아저씨는 누군가의 엄마 아빠다. 약을 하지 않을 때면 아이를 학대한다. 학대당한 아이는 바깥으로 나돌다 나쁜 형들의 꾐에 빠져 형들이 마약을 팔 때 망 보는 일로 용돈을 벌기 시작한다. 망을 잘 보는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 판매책을 맡는다. 누군가의 엄마 아빠가 그 아이에게 약을 사러 온다. 그야말로 순환의 지옥이다.

피트는 고층 주거 형태인 ‘타워’와 대비되는 곳이기도 하다. 타워 역시 약쟁이와 갱으로 가득 찬 지옥이다. 피트가 구멍가게라면 타워는 인구가 밀집된 대형 마트 버전의 지옥이다. “디안젤로, 너는 이제 타워에 나올 필요는 없어. 당분간 구덩이에서 푼돈이나 관리하도록 해”라는 식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그런데, 구글 지도에 ‘더 피트’라는 깃발이 찍혀 있다니, 설마 그곳이 실제 촬영 장소라는 표시일까?

구글 맵 오른쪽 아래에 있는 사람 모양(스트리트 뷰 아이콘)을 끌어다가 바로 옆 도로 위에 놓자 익숙한 경관이 모니터에 펼쳐졌다. 집보다는 창고와 더 닮은 2층짜리 적벽돌 다세대 주택들이 오래된 나무처럼 거기 서 있었다. 왼쪽 위에 뜬 구글 맵 히스토리 창에서 같은 거리의 2007년도 사진으로 시간을 되돌려 봤다. 거리에 다니는 차종의 세대, 쓰레기 덤스터의 색상 등이 바뀌며, 마치 누군가 추억의 향수라도 뿌린 듯 드라마 속 장면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오마르를 뜨겁게 사랑했던 만큼, 아예 마음을 먹고 그와 가슴 절절한 이별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다.

‘‘'더 와이어 실제 촬영 장소’ 등을 검색하자 수많은 블로그와 기사가 쏟아졌다. 이 드라마의 첫 시즌이 2002년에 공개되었으니,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럼에도 아직 많은 촬영지들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었다. ‘더 와이어’의 주인공 형사 맥널티와 그의 파트너 벙크가 간혹 위스키 나발을 불던 철길에도 가보고, 오마르가 자주 들리던 편의점에도 가보고, 웨스트 갱들과 이스트 갱들이 농구 시합을 벌였던 야외 농구장에도 가봤다. 움직이는 것은 마우스 커서뿐이었지만, 주접이 일상인 나의 마음은 이미 적당하게 뜨거워져 있었다.

구글의 스트리트 뷰로 이곳저곳의 거리를 돌아 보니,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장면들이 실제 도시였다. 뜨거워진 가슴에 문득 한 생각이 파고들었다. 이 정도면 완전 볼티모어를 그대로 쓴 게 아닌가? 아니, 그보다 이건 거의 볼티모어가 주인공인 수준인데? 건물이 불타고 난 뒤 아무것도 지어지지 않은 채 남은 공터, 사람이 살지 않아 텅 빈 건물 2층의 깨진 유리창이 하나의 캐릭터로 보였다. 배우 황정민을 황정민으로 등장시킨 영화 ‘인질’처럼 ‘더 와이어’에선 실존 공간인 볼티모어가 주인공이었던 셈이다. 인구 10만 명당 55.5명의 살인율로 미국 내 2위를 차지한 도시, CBS가 뽑은 가장 빠르게 쇠락하는 미국의 주요 도시 순위에서 2위를 차지한 도시, 미국 평균인 12.2%의 갑절에 근접한 21.8%의 빈곤율을 기록한 이 도시야말로 이 드라마가 가진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모태다.

볼티모어가 ‘더 와이어’가 가진 이야기의 모태라는 것은 빈말이 아니다. 오마르는 2012년에도 죽었다. 극중 오마르 캐릭터에 영감을 준 도니 앤드루스가 2012년에 죽었다. 1953년생인 그는 볼티모어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마약상을 터는 무장 강도로 이름을 날렸다. ‘여자와 아이들은 절대 해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986년 한 마약 조직 보스의 의뢰를 받아 공범과 함께 두 명을 살해한다. 이후 죄책감에 시달리다 볼티모어의 강력계 형사에게 자백하고, 투항한다. 형사는 살인을 의뢰한 교사범과 살인에 가담한 공범을 잡기 위해 도니 앤드루스의 몸에 ‘도청기’를 단다. 도니의 몸에 도청기를 단 강력계 형사가 바로 ‘더 와이어’의 각본을 공동 집필한 에드 번스다.

그가 몸에 달았던 도청기(wire)를 비롯한 그의 인생, 또 그와 에드 번스의 인생이 벌어진 도시 볼티모어의 정조가 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더 와이어’를 보고 이 도시를 찾는 이유다. 심지어 위키트래블에 ‘더 와이어 여행’이라는 코스까지 있을 정도다. 거기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대중교통망이 충분치 않으니 편의와 안전을 생각해 걸어다닐 생각은 하지 말 것.”


오마르를 추억하려다 볼티모어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드라마에서 오마르는 샷건을 든 채, 다리를 절뚝거리며 볼티모어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도시의 거리를 한참 들여다본 뒤여서인지 드라마 속 장면을 떠올리는 내 기억의 색이 더욱 선명해졌다. 차선이 보이지 않는 도로, 도로 옆 건물의 출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에 앉아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흑인 아이들, 그 아이들이 입고 있는 집업 후드 티셔츠가 떠올랐다. 실존하는 동네는 이렇듯 픽션에 걸어둔 주문처럼 언제든 강력한 연상의 마법을 일으키곤 한다. 초보 소설가인 나와 내 아내가 한국일보에 ‘동네의 발견’ 연재를 시작하면서 뜬금없이 미국의 도시인 볼티모어를 꺼내든 이유기도 하다.

HBO에서 제작한 ‘더 와이어’는 2008년에 다섯 번째 시즌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역시나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리즈’라는 평을 받곤 하는 ‘소프라노스’가 방영됐다. ‘더 와이어’는 ‘소프라노스’의 인기에 가려 큰 빛을 보지 못했다. 방영 당시에도 몇몇 평론가들이 상찬을 하긴 했지만, 상복은 딱히 없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리즈’라는 칭호는 시리즈가 끝난 지 10년이 흐른 2018년께부터 통용되기 시작했다.

‘더 와이어’에서 마약 갱단의 말단 꼬맹이 ‘월리스’ 역으로 출연했던 마이클 B 조던은 어느새 건장한 청년이 되어 ‘블랙 팬서’에 에릭 킬몽거로 나왔다. 2017년 ‘가디언’은 ‘더 와이어’ 이후 15년이 지난 볼티모어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조망하는 기사를 냈다. 이 기사의 한 캡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극중 오마르가 살해당한 편의점은 프레디 그레이의 사망 사건으로 벌어진 2015년 폭동 때 불에 타 무너졌다.” 구글 맵을 통해 찾아본 자리는 아직 공터로 남아 있다. 아이는 청년이 됐지만, 도시는 변하지 않았다.


박세회 (소설가·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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