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옮겼더니 350억...화가들이 사랑한 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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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9 10:00
<76> 강남 수향 ② 장쑤성 저우좡과 저장성 난쉰

2016년 4월 4일 홍콩 미술품 경매장. 유화 한 점이 350억 원에 낙찰됐다. 우관중(吳冠中·1919~2010)이 그린 ‘저우좡(周莊)’이다. 우관중은 1985년 부인과 함께 강남 수향인 저우좡을 찾았다. 스케치하고 수묵화를 그렸다. 12년 후인 1997년 마음 깊숙이 담아둔 수향의 인상을 발효해냈다. 3m에 이르는 유화로 탄생했다. 도랑 위 볼록한 다리, 골목 사이 가옥이 성곽처럼 웅장하다. 조금 비현실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장다첸, 치바이스와 함께 20세기 중국 최고의 화가인 우관중은 ‘수향(水鄕)’ 작품을 많이 남겼다. 대부분 담백하고 산뜻한 붓 터치다. 베이징 예술문화 거리인 798예술구에서 그의 작품 전시회를 본 적이 있다. 돌다리와 덮개를 두른 배, 회백색 담장과 검은 지붕, 도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질펀한 인간미까지 두루 담았다. 거의 대부분 수묵화다. 빨래하는 여인과 뱃사공, 관광객이 붉은색으로 선명하다. 초록색으로 드러난 나무까지 이전에는 본 적 없는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이어리와 엽서, 캐릭터와 생활용품 디자인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화수분으로도 감당 못할 황제의 이자 벌칙

장쑤성 쑤저우 시내에서 30㎞ 남동쪽에 저우좡이 있다. 행정구역으로 쿤산(崑山)에 위치한다. 주차장부터 수향 냄새를 물씬 풍긴다. 북송 시대인 1086년에 유지이던 주적공(周迪功)이 전복사(全福寺)를 세웠다. 은덕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의 성을 따서 저우좡이라 불렀다.

‘산천의 아름다움을 다 모은 황산’이 있다면 ‘수향의 아름다움은 저우좡이 다 모았다’고 자랑한다. 수향이 모두 같은 모습이 아니듯 사람마다 느끼는 감성은 다르다. 자랑은 그냥 자랑일 뿐이다. 제일이라고 다툴 수향은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화가가 보는 눈은 좀 다른 듯하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350억 원의 가치를 그린 수향이 분명 저우좡이다. 유난히 저우좡은 화가의 주목을 끄는 힘이 있다.


미리 예약한 객잔에 짐을 풀었다. 나테완스(拿鐵玩石)인데 영어로는 ‘Carton king Art Space’라 표기했다. 수향 입구와 가깝고 객실도 많은 편이다. 맛집 식당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나름 랜드마크다. 타이완의 종이공예 기업 지상왕(紙箱王)이 2012년에 개장했다.

남녀 어린이 종이 모형이 반갑게 인사한다. 마당에는 하트나 동물 모형 등을 설치해 나름 ‘예술 객잔’ 분위기가 난다. 고급 호텔 수준의 방도 깔끔한 편이다. 무엇보다 창문을 열면 보이는 수향의 풍경을 벽에 고스란히 그려 놓았다. 첫인상이 아주 좋다. 촉촉한 느낌의 침대도 푹신하고 화장실도 깨끗하다.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큰길 옆이라 사람이 많고 조금 시끄럽다.


객잔 후문으로 나가면 도랑으로 이어진다. 돌다리가 줄지어 보인다. 청룡교를 지나 걸어가면 태평교다. 바로 옆에는 쌍교가 있다. 도랑이 갈라지는 지점이라 다리 두 개가 나란하게 붙었다. 세덕교는 동그랗고 영안교는 평탄하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처음 세워진 다리다.

우관중 보다 1년 먼저 방문해 쌍교를 그린 세계적인 화가가 있다. 저장성 닝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천이페이(陳逸飛·1946~2005)다. 화가는 ‘고향의 추억(故鄉的回憶)’이라 제목을 붙였다. 전통 수묵화 기법으로 그린 유화 작품이다. 유태인이자 미국 석유 재벌인 아먼드 해머(Armand Hammer)가 구매했다. 1984년 해머는 중국 진출을 위해 덩샤오핑과 만나는 자리에 이 그림을 선물로 가져왔다.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중국 정부가 대서특필을 허락했다. 이듬해 유엔이 발행하는 우편엽서의 배경그림으로 선정했다. 저우좡이 더욱 유명해졌다.

쌍교 도랑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심청(沈廳)이 나타난다. 명나라 초기 거상인 심만삼의 후손 심본인이 건륭제 시대인 1742년에 건축했다. 2,900㎡ 규모로 100칸에 이른다. 원나라 마지막 해에 아버지를 따라 이주해 상인으로 자리 잡은 땅이다.

도교 사원에 가면 재신전이 있다. 지역마다 재신이 꽤 다양하지만 대부분 문인이나 무장이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상인 3명을 재신으로 본받고 있다. 상인 정신이 살아있다는 ‘활재신(活財神)’이라 추앙한다. 심만삼과 함께 허난의 강백만, 산둥의 완자란이다. 대를 이어 수백 년을 이어온 상인 가문이다. 중국을 다니다 보면 그림이나 판화로 심심치 않게 만난다. 강백만장원에서 3명이 나란히 앉은 조각상을 만나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심청 내부에 장사로 돈을 벌고 ‘살아있는 재신’이 되는 과정을 동판 벽화로 만들어 놓았다. 심만삼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시대 거상이다. ‘명사(明史)’에 따르면 도성 건축비를 부담했다는 기록이 있다. 황제의 환심을 샀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다. 이어지는 정사 기록은 황제의 군대 포상의 뜻을 적고 있다. 심만삼이 전 사병에게 은자를 나눠주겠다고 건의했다. ‘필부가 감히 천자의 군대를 위무해’라는 기록도 남겼다. 황제의 심기가 아주 불편했다. 도성 건축과 군대 포상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황제는 황궁으로 심만삼을 초청한 후 동전 하나를 하사했다.



황제: 화수분이 있어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고 들었네. 너에게 동전 하나를 주겠노라.
만삼: 성은을 내려주셨으니 은혜를 어찌 갚으면 되겠나이까?
황제: 이문을 남겨 돌려달라!
만삼: 황제께서 하사하신 동전이니 이자 계산은 어떻게?
황제: 매일 전날의 두 배 이자로 달라! 한 달이면 되겠다.
만삼: 그리 하겠나이다.


겨우 동전 하나라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온 심만삼은 경악했다. 30일이 지나면 무려 5억 3,000만 량이 넘는다. 하루마다 두 배씩 불어나는 마법의 화수분이 있다해도, 전 재산을 다 쏟아도 모자랄 ‘무한’의 숫자였다.

심만삼은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멀리 윈난으로 유배를 당했다. 유배지에서 장사의 기회를 만들었다. 상인의 혈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가문을 유지하고 금맥을 이었다. 심청에 들어서면 화수분인 취보분(聚寶盆)과 만삼통보(萬三通寶)가 보인다. 나무에 달린 잎사귀는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만세복택(萬世澤福) 편액도 보인다. 거상이 이룬 복은 오래간다는 말이다. 복을 나누려는 관광객은 서슴없이 동전을 던지고 또 던진다.



지붕 담장에 호랑이가 조각돼 있어 놀랐다. 지붕 위의 호랑이는 생전 처음 본다.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로 만들었을 듯하다. 하늘에서 뛰어내려온 듯 생생하고 해학이 넘친다. 골목에 있는 정자를 지나다가 무심코 위쪽을 올려다봤다. 도금된 봉황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 확 다가올 듯 붙어 있다. 복을 상징하는 박쥐인 줄 알았다. 황궁에 있어야 할 봉황이 수향에 있으니 무슨 까닭인지 또 궁금하다.

초록 잎사귀가 달라붙은 돌다리를 노 저으며 배가 지나간다. 아치형 다리와 풀잎까지 동그랗게 그린 운치다. 대나무 고깔 쓰고 가는 청소부 덕분에 도랑이 깔끔하다. 골목은 좁고 양쪽 모두 가게가 번창이다. 도랑 쪽으로 찻집도 많다.


전펑제(貞豐街)에 있는 도관인 징허도원(澄虛道院)을 관람한다. 1093년 북송 시대 처음 건축됐다. 옥황대제를 봉공하는 성제전에 들어선다. 소원을 담은 광명등이 양쪽에 있고 금동과 옥녀가 보좌하고 있다.

벽에는 10명의 천병천장(天兵天將)이 호령하고 있다. 문장의 신 괴성과 자연을 관장하는 우사, 풍백, 뇌공, 전모는 모두 신화에 등장한다. 역사 인물도 도교 신으로 부활한다. 상나라 재상으로 재신인 조공명은 조현단이 됐다. 온천군과 주천군, 마원사와 악원사도 있다. 문인이나 무장이 천군이나 원사로 변모해 신앙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알만한 인물은 악원사로 변모한 영웅 악비 정도다.



족발을 족발이라 부르지 못하고… 기적의 작명 ‘만삼제’

수향 남쪽 끝 전복사까지 거닌다. 갑자기 모터 소리 요란하게 배 한 척이 질주한다. 물품이나 공사 재료를 나른다. 느릿하게 노 젓고 물결이 찰랑이는 여운도 있지만, 경제 발전의 속도를 막을 수 없다.

다시 도랑을 건너 반대쪽 거리를 걷는다. 모터 소리가 사라지니 다시금 고요가 찾아온다. 몸뚱이를 도랑 깊이 담은 가옥이 차례로 고스란히 반영을 연출한다. 도랑 바닥부터 수북하게 풀이 자라 담장까지 덮은 모습도 있다. 열린 창문에는 화분과 술잔이 놓였다. 우관중의 ‘저우좡’을 보면 돌다리 너머 가옥이 3~4층 정도 겹겹이 솟아있다. 아무리 거리를 둘러봐도 그림 속 장면을 찾을 수 없다. 유화가 주는 느낌이 딱딱하고 무거워서 일지도 모른다. 그저 허심탄회한 수향이 격의 없이 다가온다.


주원장이 심만삼의 집을 방문했다. 상차림에 돼지 족발이 통째로 올랐다. 칼로 베어 나눠먹는 요리다. 황제가 요리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먹는지 물었다. 돼지 족발은 저제(猪蹄)다. 황제의 성인 주(朱)와 돼지 저(猪)의 중국어 발음은 똑같이 ‘zhu’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할 수 없었다. 황제를 칼로 베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겉으로 태연스러웠지만 속은 바늘방석이었다.

순간 자신의 대퇴부를 때리며 ‘만삼제(萬三蹄)라 하옵니다’라 했다. 저우좡은 심씨 일가가 즐겨먹던 만찬인 팔대완(八大碗)으로 유명하다. 육해공 재료에 채소와 버섯으로 요리한 8가지 요리다. 한가운데서 중심을 잡고 있는 요리가 만삼제다. 수백 년을 이어오며 저우좡을 대표하는 요리가 됐다. 강남 수향 일대 어디를 가도 거리마다 파는 족발은 만삼제라 부른다. 우리 족발과 요리 방법이 다르지만 생각보다 꽤 맛있다.

작은 고을에 재벌 가문이 넷

장쑤성에서 저장성으로 이동해 서남쪽 70㎞ 떨어진 수향으로 간다. 후저우(湖州)에 위치한 난쉰(南潯)이다. 입구를 통과해 통리교(通利橋)를 건넌다. 촉촉하게 비가 내리니 수향의 풍치가 더욱더 좋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도랑을 따라 거닌다. 홍등 7개를 한 묶음으로 30줄 이상 길게 늘어진 담장이 보인다. 홍등 묶음이 몇 개인지를 기준으로 저택이나 식당의 위상을 정한다. 이다지 길게 늘어뜨린 가옥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 거상 장석명이 광서제 시대인 1905년에 건축한 저택이다. 면적이 7,000㎡이고 150칸에 이른다.

난쉰은 명나라 만력제 시대부터 청나라 중기까지 잠사(蠶絲)와 비단 직조로 유명했다. 거의 200여 년 동안 상업이 번창한 전성기였다. 청나라 멸망 후에도 영향력이 대단했다. ‘후저우 전체가 난쉰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거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사대상(四大象), 팔고우(八牯牛), 칠십이금황구(七十二金黃狗)’라는 말이 생겨났다. 코끼리, 황소, 개는 난쉰 상인에 대한 비유다. 비단과 소금으로 사업한 장씨 집안의 재산을 환산하면 200억 위안이 넘었다는 말도 있다. 현재 가치로 3조 4,000억 원이다. 사대상 중 하나다. 이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황소도 있고 방귀깨나 뀌는 상인도 길거리 개만큼 많았다. 부자 수향이라 할만했다.


비옷 입은 딸과 함께 아주머니가 담장을 지난다. 연한 하늘색 유지산을 들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수향에 참 어울리는 우산이다. 나뭇잎 없는 앙상한 나무가 도랑으로 떨어질 듯하다. 꼿꼿한 나무도 있다.

흥복교(興福橋)에 이르니 배가 지나고 있다. 비가 와도 젖지 않도록 덮개가 있다. 수향에는 가볍게 식사하며 유람할 수 있는 배가 많다. 담장과 기와의 앙상블인 분장대와(粉牆黛瓦)가 도랑 옆으로 어울린다. 지붕 끝 담장은 마두장(馬頭牆)이라 부른다. 말의 머리와 닮았다. 바람을 막거나 화재가 번지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물론 벽사의 의미도 강하다.

도랑 건너에 유씨제호(劉氏梯號) 저택이 보인다. 붉은 등과 노란 등이 함께 걸렸다. 청나라 말기 장원급제를 한 정치가이자 사업가인 장건이 ‘저장성에 도의를 능히 지키고 당대를 빛낸 상인이 셋이 있다’고 했다. 서태후로부터 홍정상인(紅頂商人)의 관직을 받은 항저우의 호설암, 닝보 상방의 선구자인 엽징충, 그리고 난쉰의 사대상 유용을 말한다.

유용은 잠사를 시작으로 소금과 선박, 부동산, 목축까지 사업영역을 펼쳤다. 사대상 중에서도 최고라 일컫는다. 자선사업에도 관심이 많아 광서제로부터 ‘낙선호시(樂善好施)’ 편액을 하사 받았다. 유씨제호는 그의 셋째 아들 유안생의 저택이다. 19세기에 그다지 크지도 않은 수향인 난쉰에 엄청난 재벌이 있었다니 놀랍다. 그것도 네 가문이다. 유용, 장석명과 함께 방운증, 고복창이 사대상이다.


광혜교(廣惠橋) 앞에 노란 담벼락의 광혜궁이 보인다. 북송 시대 처음 건축된 도관이다. 원나라 말기 민란을 일으키고 주원장과 쟁투를 벌인 장사성의 행궁이었다. 장왕묘(張王廟)라고도 부른다.

다리를 건너니 일사일호(一絲一毫) 간판에 실크로 만든 옷이 걸려 있다. 중국에 비단의 발원지라고 주장하는 장소가 많다. 난쉰도 그중 하나다. 비단으로 부를 쌓았으니 당연하다. 유리로 가린 커다란 붓이 보인다. 비단과 함께 난쉰의 특산은 산롄호필(善璉湖筆)이다. ‘모영지기갑천하(毛穎之技甲天下)’라는 찬사가 있다. 붓을 품위 있게 모영이라 한다. 붓을 만드는 솜씨가 천하제일이라는 말이다. 후저우 붓의 고향인 산롄은 서남쪽으로 약 30㎞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한 바퀴 돌아 다시 장석명 옛집에 이른다. 서서히 어둠이 몰려온다. 직접 제조한 쉰주(潯酒)로 얼큰하게 취하니 선계의 야경이 보이는 듯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홍등 아래 연인도 지나고 아이들도 걸어간다. 홍등보다 더 붉은 반영이 도랑을 파고든다. 돌다리에 올라 난간에 기대앉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조명이 도랑을 깊게 수놓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적막하고 어둠이 깊어진다. 물속으로 귀를 기울인다. 천년 수향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곤소곤 재잘거리는 듯하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