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기시다 후미오 전 정조회장이 당선되며 막을 내린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는 이례적으로 4명의 후보가 나서 2주 동안 거의 매일 TV 출연과 토론을 거치며 흥행에 성공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장기집권 기간은 물론 지난해 스가 요시히데 총리 당선 때도 없던 새로운 모습에 일본 국민의 관심이 집중됐고, 사상 처음으로 복수의 여성 후보가 출마해 토론하는 모습도 신선했다. 하지만 각 진영이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개한 국회의원 표 획득 싸움은 사실상 아베 전 총리의 구상대로 전개됐고, 후보들의 운명 역시 아베의 뜻대로 결정됐다. 정치권 내 '아베의 힘'을 모두가 체감한 과정이었다는 평가가 이어진 이유다.
다카이치 사나에 전 장관은 8월 출마 의향을 밝혔을 때만 해도 인지도가 매우 낮아 “추천인 20명조차 모으지 못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아베 전 총리가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지지를 압박하자 부담감을 느낀 의원들의 표가 쏠렸다. 1차 투표에서 예상을 깨고 고노 다로 행정개혁장관보다 많은 국회의원 표가 쏟아진 것은 아베의 영향력을 실감케 하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총리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다른 후보에 비해 외교·안보에서 강경한 발언을 할 수 있었던 다카이치는 아베가 원했던 대로 자민당에 보수색을 한층 강화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총리가 돼도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한다는 등 선거 기간 내내 강성 발언을 이어가면서 ‘넷우익’ 등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고, 단숨에 ‘첫 번째 여성 총리’ 후보의 반열에 올랐다. 기시다 역시 아베와 다카이치를 의식해 비둘기파 파벌인 고치카이의 수장이면서도 중국 인권문제를 담당하는 보좌관을 두겠다는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놓을 정도였다.
반대로 고노 장관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아베 전 총리와 불화가 깊은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과 손을 잡은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시바 전 간사장, 고이즈미 신지로 환경장관 등 국민적 인기가 높은 인물이 힘을 합쳐 당원·당우 표에서 압승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정작 당원 표는 절반도 못 되는 44% 득표에 그쳤다. 오히려 이시바의 합류는 “고노는 안 된다”는 아베의 강한 반발을 불러 국회의원 표마저 빼앗겼다. 갑자기 ‘소비세를 통한 연금 최저보장제도’ 공약을 내놓아 증세에 대한 우려를 낳는 등 돌출적 행보도 문제였다. 자민당 지지율이 오르면서 ‘선거의 얼굴’로 적합한 고노 장관을 지지했던 젊은 의원들도 파벌과 아베의 집요한 압박에 마음을 돌렸다.
‘기시다 총리’가 중의원 선거와 내년 참의원 선거를 제대로 치르지 못해 단명하면 고노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란 분석도 있지만, 한편에선 이번 패배로 고노가 ‘이시바화(化)’할지 모른다는 예측도 나온다.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시바는 2012년 55%의 당원 지지를 얻고도 국회의원 표에서 앞선 아베에게 졌는데, 이후 아베와 대립하면서 당내 기반이 더욱 약해졌고, 지난해까지 총 네 번의 총재 선거에서 패배를 거듭했다. 자칫 고노 역시 “국민 지지율은 높지만 당내 지지는 갈수록 약화하는” 이시바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