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으로 마지막이야.' 남자는 술잔을 연거푸 기울였다. 술잔과 술잔 사이로 지난 40여 년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젊은 시절 사업에 성공해 돈 좀 만지기도 했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 빈털털이 신세로 10년 넘게 살아왔다. 그렇게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모두가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라면 개발에 손을 댔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면의 보존성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술이라도 거나하게 마시고 인생을 마감하겠노라고.
그때 남자의 눈에 요리사가 덴푸라를 튀기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저거야.' 재료에 튀김옷을 입혀 끓는 기름에 넣으면 거품이 보글보글 끓어 오른다. 바로 튀김옷의 밀가루 반죽에서 수분이 빠져나오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같은 원리를 면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부패의 원인은 미생물의 발생이고, 미생물은 수분 탓에 발생하니 면에서 수분을 제대로 뽑아내기만 한다면 보존성을 높일 수 있다. 그렇게 남자는 생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찾은 술자리에서 전화위복과 권토중래의 실마리를 얻는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어머니가 구독했던 여성지에서 읽었던 '라면의 아버지'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의 이야기다. 이렇게 비장한 속내가 있었군. 막 두려움을 무릅쓰고 가스불을 켜 라면을 내 손으로 끓여 먹기 시작했던 시기라 그의 이야기가 한층 더 호소력 있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시의적절하면서도 극적이라 되레 믿기가 어렵다. 예전에도 술집에 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진작 덴푸라에서 영감을 얻었어야 하지 않을까?
안도는 1910년 3월 5일,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 자이현에서 태어났다. 중국계로 본명은 오바이푸(吳百福)였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포목상을 꾸리는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사업에 대한 감각도 이때 익혔다. 1933년 일본으로 건너와서 리츠메이칸 대학을 다니는 동안 의류 도매업으로 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환등기 사업에, 이후에는 참숯 제조와 판잣집 건축업을 시도했는데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1948년에는 제염회사를 설립했는데, 바로 오늘날 닛신 라면의 전신이다.
젊은 나이에 성공의 맛을 보았지만 지속가능하지는 않았으니 안도는 갖은 고초를 겪는다. 일단 전쟁 중 나라에서 지급한 자재를 횡령했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받다 45일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1948년에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방식으로 탈세를 저질러 수감됐으며(1950년에 무죄 석방),1958년에는 이사장직을 맡고 있던 신용조합이 파산해 무일푼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그 시점에서 안도는 즉석 라면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패망한 일본은 전후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주식인 쌀이 부족해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밀가루를 빵으로 만들어 배급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본인들의 식성에는 빵보다 국수가 더 맞을 거라 생각해 관청에 건의했지만, 국수 제조업체들이 영세하기 때문에 수요를 안정적으로 못 맞춰줄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런 가운데 안도는 일본 오사카의 길거리에서 보았던 라멘 포장마차의 기억을 떠올렸다. 추운 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해 벌벌 떨면서도 한 그릇을 먹겠다고 사람들이 20~30m씩 줄지어 서 있었다. 이런 음식이라면, 이런 음식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다면 식량난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소면과 달리 완성된 맛을 품고 있으며 비싸지 않고 간편하게 금방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면 음식, 바로 즉석 라면이었다.
안도는 집 마당에 오두막을 짓고 중고 제면기와 큰 웍을 사서 즉석 라면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면발이 맛을 품으면서도 적당히 힘을 지니고 있도록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그는 뽑아낸 면에 원예용 물뿌리개로 스프를 뿌린 뒤 건조하는 방식으로 맛을 들이는 한편 조리 과정을 간소화시키려 시도했다. 하지만 즉석 면의 개발이 처음부터 원활하지는 않았다. 간편함과 보존성을 동시에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기 보존을 위해 면에서 수분을 최대한 제거했다가, 다시 끓일 때에는 최소한의 조리로 제대로 된 음식이 되어야만 했다.
개발과 고민의 날이 이어지던 가운데 어느 날, 안도는 아내가 튀김을 만드는 광경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고온의 기름에 튀김거리를 넣으면 밀가루에서 수분이 빠져 나온다. 밀가루 반죽에서 뽑은 면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수분이 빠진 자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잘한 구멍이 남아 다공질이 된다. 이렇게 가공한 면을 뜨거운 물에 끓이면 수분을 흡수하면서 다시 먹기 좋게 부드러워진다. 물론 기름에 튀겨 말린 면이라면 보존성도 생면보다 훨씬 더 좋아진다. 그렇게 안도는 밀가루로 만든 면을 뜨거운 증기로 익힌 다음 기름에 튀기고 건조해 즉석면을 개발했다. 오늘날 '순간유열건조법'이라 불리는 즉석 라면 제조법이다.
1958년, 세계 최초의 즉석 라면인 닛신 치킨라멘(Chikin Ramen)이 탄생했다. 안도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라면을 개발하며 가족들에게 '닭 육수를 좀 더 가져오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줄여서 '치킨'이라고만 말하게 됐으니, '치킨라멘'이라는 상품명도 그렇게 정해졌다고 한다. 훗날 안도는 자신과 닛신의 성공을 닭고기 바탕의 라면이라고 분석했다. "닭고기 스프 덕분에 즉석 라면은 종교적인 금기의 제약을 받지 않고 전 세계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힌두교도라면 쇠고기를, 무슬림이라면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지만 닭고기를 금기시하는 문화, 종교, 국가는 없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즉석 라면 개발에 성공했지만 저렴한 먹거리를 제공하겠다는 안도의 바람은 처음부터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최신의 기술을 적용했던 탓에, 치킨라멘이 음식점의 라면보다 5배나 더 비쌌다. 다행스럽게도 이후 가격이 계속 내려가, 라면은 오늘날 안도가 개발을 시작하며 염두에 두었던 입지를 누리고 있다.
아예 불을 쓸 필요가 없는, 뜨거운 물만 부어 바로 먹을 수 있는 컵라면도 역시 닛신이 개발했다. 닛신 또는 라면의 두 번째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컵라면 개발의 계기는 1966년의 미국과 유럽 출장이었다. 홍보차 현지인들에게 치킨라멘을 권했는데 그릇이 없어 제대로 나눠 건네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종이컵에 라면을 담아 포크로 면을 먹는 사람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착안해 컵라면 개발을 시작했다. 물에 넣고 끓이는 조리 과정을 생략하는 게 관건이었으니 일단 면발을 보통 라면보다 더 가늘게 뽑는 한편, 더 빨리 익는 감자전분을 밀가루와 섞었다. 또한 대류 현상으로 인해 용기 아랫면보다 윗면의 물 온도가 높으므로 면 또한 위쪽에 더 촘촘하게 배치시켰다. 한편 이와 더불어 발포 스티로폼 용기를 적용하고 동결건조 건더기를 첨부하는 등, 치킨라멘처럼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 담긴 '컵누들'이 1971년 9월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2001년에는 '라면을 우주에 가져가고 싶다'는 목표 아래,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와 협업해 우주 라면 '스페이스 라무'의 개발도 시작했다. 우주 비행선 내의 최대 온도인 70도의 물로도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복원이 가능한 것은 물론, 무중력 상태에서도 날아가지 않는 면의 개발이 관건이었다. 순간유열건조법을 적용하고 밀가루와 전분의 배합을 변경해, 70도의 물로도 면의 절반이 복원되는 우주 라면이 개발됐다. 이 우주 라면은 2005년 스페이스셔틀 디스커버리호에 실렸고, 일본인 우주인이었던 노구치 소이치가 우주정거장에서 먹었다. 안도는 '인간은 어디에 가더라도 식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식이라는 꿈만 같은 이야기가 실현되어서 기쁘다'라는 감상을 남겼다.
안도는 2005년, 명예회장이 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신제품을 직접 맛보거나 출시를 결정하는 데 의견을 보탰다. 그는 라면이 밀가루 음식인 데다가 팜유나 MSG 등으로 건강에 나쁜 음식이라는 멍에를 쓰자 "라면이 세간의 인식처럼 해로운 음식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그 이유로 자신을 내세웠다. 매일 한 끼 자신이 직접 치킨라멘을 끓여 먹었지만 90세가 넘는 나이까지 건강하다며, 비결로 '라면과 주 2회 골프'를 꼽았다. 그는 2007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도 잘 알려졌듯, 한국에서는 '삼양라면'이 1963년 최초로 등장했다. 기술 이전을 받아 단 5년 만의 시차를 업고 등장한 라면은 닛신의 치킨라멘과는 사뭇 달랐다. 치킨라멘이 이름처럼 맵지 않은 닭고기 국물 바탕이었다면 삼양라면은 '한국인이라면 매운맛을 좋아하니까'라는 윗분(?)의 지시로 얼큰해졌다. 이후 50여 년, 라면은 1년에 33억 개, 1인 평균 70개를 소비하는 '국민 식품'으로 자리잡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입지 또한 많이 바뀌어 라면의 기원이 그러했듯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음식에서, 오늘날엔 상당 부분 별식으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