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밥집에까지 등장한 로봇은 일자리 소멸이 이미 시작됐음을 의미한다. ‘유엔 미래보고서 2050’에 따르면 2050년 전 세계 실업률은 24%에 달할 전망이다. 그런가 하면 '줌'으로 상징되는 디지털 네트워크 발달로 집과 사무실의 구분이 흐려지면서 전통적 근로시간 규율체계도 변화 압력을 받고 있다. 대리기사부터 쿠팡맨까지 플랫폼노동자, 특수고용(특고)노동자도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노동환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도, 전통적 노사관계와 근로계약관계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는데도, 정부와 정치권의 대응은 더디기만 하다. 노사정 모두 자기 입장만 반복하며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일보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우리나라가 직면한 핵심 현안들을 공론화하고 실질적 정책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한 ‘대한민국 지속가능 솔루션’ 프로젝트 노동분과 첫 회의에서 전문가들은 근로기준법을 포함해 변화된 산업환경에 따른 근로계약 개선방안을 제시했다.
전문가들은 노동관계의 기초가 되는 근로기준법이 시대에 맞지 않게 너무 경직되어 있는 만큼 근로자 특성에 따라 좀 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특히 고임금근로자와 저임금근로자는 근로기준법을 차등 적용하고, 대신 5인 이하 사업장도 어떤 형태로든 법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됐다. 경영자에 대한 무차별 형사처벌도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해고 자유화'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자리 위기에 대응하려면 전국민고용보험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며, 필요하다면 일자리 나누기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플랫폼 및 특고노동자의 경우 보호가 필요하지만 포괄적 입법보다는 개별 특성에 맞는 정책대응을 주문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노동문제는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 사회적 논쟁과 공론화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번 대선에서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입을 모았다.
27일 본사에서 열린 노동분과 첫 회의에는 위원장을 맡은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와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욱래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 이왕구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참석했다.
권순원 교수=인간 노동력이 불필요한 스마트팩토리가 늘고 있고 초밥집조차 자동화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2025년쯤 되면 1만5,000명 정도가 정년퇴직하는데 신규 채용 예상 규모는 퇴직 인원에 턱없이 못 미친다. 친환경자동차로 인한 공정축소, 노동과정 자동화 등이 원인이다. 기술발달에 따른 일자리 소멸과 전환에 대비해야 한다.
정흥준 교수=변화는 세 가지로 귀결될 것이다. 첫째, 숙련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맡겨질 것이다. 기업은 이전처럼 고ㆍ대졸자를 받아서 필요한 기술력을 전수해 주는 방식의 인력 운용을 하지 않는다. 둘째, 저숙련ㆍ중숙련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력 과잉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반면 고숙련 분야는 인력난이 심해져 저ㆍ중숙련과 고숙련자 간 임금ㆍ복지 차별 등 이중구조가 가속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수고용노동자(특고)와 같은 개별 계약이 급증해 이들의 ‘노동권 배제’가 중요 이슈가 될 것이다.
이욱래 변호사=‘노동의 시대’가 왔다고 할 정도로 노동사건의 폭증은 최근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2000년대 초 시작된 사내 하청 불법파견 문제는 통상임금, 최저임금 사건으로 이어졌고 최근에는 다양한 특고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다툼이 법정에서 가려진다는 점이다. 판사 1명 또는 3명이 수조 원이 왔다갔다하는 통상임금이나 불법파견 여부를 결정하는 ‘노동의 사법화’ 현상은 아무래도 후진적이다.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조정한 것처럼 입법부가 나서서 근로관계 변화에 따른 문제의 해법을 내줘야 한다.
박귀천 교수= 노동법은 산업혁명이라는 획기적 변혁기에 등장했다. 쓰나미와 같은 변혁의 상황에서 쓸려 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존엄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혹은 근로시간 규제처럼 최소한의 건강보호와 생존이라도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노동법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권순원=일자리 소멸이 가장 우려된다. 전국민고용보험이나 더 나아가 기본소득 같은 것도 이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비자발적으로 노동시장을 이탈한 사람들이 재취업할 때까지 이런 식으로 소득을 보존해야 한다. 근로시간을 줄여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정흥준=전국민고용보험과 함께 상병수당 도입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부족한 인력 양성도 중요한 과제다. 미스매칭을 해소하는 고용서비스가 이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예전처럼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소개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 전략이 필요하다. 현재처럼 고용노동센터가 아닌 고용서비스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고용서비스 공단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이욱래= 고용서비스와 관련한 국가 개입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스타트업이나 핀테크기업에서 일하는 개발자 같은 이들이 고숙련자다. 이들은 창작ㆍ창의적 일을 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국가가 자유롭게 알아서 활동할 수 있는 플레이그라운드를 만들어주는 게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박귀천= 일자리가 없는 건 대기업ㆍ공기업 등 극소수의 사정이고 중소기업에서는 구인난이 심각하다. 청년들에게 “중소기업에 왜 안 가느냐”고 질문하면, 고용이 불안정하고 근로시간이 길고 인사ㆍ경력관리도 안 된다는 등의 지적이 되풀이된다. 모두 가고 싶어하는 소수의 일자리는 무한정 만들 수 없다. 열악한 일자리를 개선해서 인력을 배치하는 일에는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권순원= 플랫폼 노동자ㆍ특고의 남용을 막고 이들을 보호하는 것도 큰 과제다. 모든 특고를 ‘오분류(실제 근로자인데도 자영업자로 분류하는 것)’로 솎아내는 규율은 불가능하다. 대리운전기사나 퀵서비스기사처럼 시장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자생적 특고’와 채권추심인ㆍ미용실 스타일리스트같이 사용자가 근로자성을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피적 특고’를 구분해서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정흥준= 특고 중에는 정규직 전환이 목적이 아니라 수수료를 공정하게 받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을 정부가 비준하면서 이들도 노조를 만들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교섭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사회 갈등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용자의 개념을 확대해 계약과 관련된 쟁점을 노사가 협의해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존 ‘표준계약서’ 방식은 강제성이 없어 유명무실하다.
박귀천= 특고는 스펙트럼이 넓어 근로자성이 강한 경우도 있고 약한 경우도 있다. 이들이 근로자성을 판단하는 법원의 판례도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 개개인이 판례에 맞춰 일일이 고용형태를 유지하기란 어렵다. 쟁점은 법적 분쟁이 일어났을 때 누가 근로자성을 입증하느냐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AB5법’이나 독일 정부의 지침 등은 근로자의 입증 책임을 완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특고가 사법부에 자신이 근로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면 지금은 이들이 근로자가 아니라는 걸 사용자나 사법부가 확인하는 방향이다. 지난해 여당에서 발의된 ‘플랫폼 종사자 보호법안’을 보자. 대원칙은 기존 노동법상 근로자로 확인되면 보호하고 그렇지 못하면 사회보험 적용이나 최소한 근로조건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과도기적 상황이라도 중간 수준의 보호와 공제회 방식의 보호가 병행 추진돼야 한다.
이욱래= 우리나라 현실은 다르다. 외국의 특고들은 산재보험ㆍ건강보험 등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사회보험으로 보호되는 혜택을 요구하는 소송을 한다. 이들을 근로자로 폭넓게 인정해도 무방하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경제적 이익인 퇴직금을 받기위해 소송하는 특고가 많다. 이런 것까지 다 포함시키면 논의가 어려워진다. 종속성이 강한 분들에 대해서는 힘의 불균형을 회복시킬 정도의 개선이 필요하지만 퇴직금 문제 등을 포함해서는 해법 마련이 쉽지 않다.
박귀천= 외국에서 특고 소송이 꼭 사회보험 적용을 요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크라우드워커(crowd worker)를 노동법상 근로자라고 본 독일 연방노동법원 판결에서는 이들의 계약해지(해고) 정당성이 다뤄졌다. (사회안전망이 허술한) 우리나라에서는 퇴직금의 노후보장, 퇴직 후 생활보장의 의미도 크다.
권순원= 특고를 일일이 분류해 각각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을 만들기는 어렵다. 다만 종속성이 강한 범주, 독립성이 강한 범주, 플랫폼이 매개인 종사자 등으로 분류해 정책적 해법을 모색해 보는 게 좋겠다. 플랫폼노동자의 고용보호는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논의해 보자. 현 정부가 추진한 전국민고용보험의 쟁점은 재원 마련이다. 고소득자가 보험료를 많이 내야 사회보험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데 이들의 세금 탈루가 많다.
정흥준= 특고도 소득기반으로 고용보험료를 산정하자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남은 문제는 기존 근로자들의 고용보험재정과 특고ㆍ플랫폼노동자 재정의 분리ㆍ통합 여부다. 재정을 통합하면 보험재정이 약간 늘어나다가 점차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 건강보험을 확대할 때처럼 정부가 저소득 특고의 보험료를 일부 지원하고 재정은 나중에 통합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교원과 공무원의 고용보험 가입도 필요하다. 이들이 가입하면 1조7,000억 원의 재원이 마련된다. 이들은 지금까지 가입 필요성을 못 느꼈고 보험료 절반을 내야 하는 예산 부처도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전국민고용보험을 결정한 이상 국민인 교원과 공무원도 가입하도록 해야 한다.
권순원=디지털 정보기술 발전에 따라 노동과정 관리가 변화했는데 코로나 사태가 기름을 부었다. 재택근무 등을 해보니 큰 문제가 없었다. 전통적 근로시간 규율 방식을 유연화해도 되는 것 아닌가라는 논의가 나온다.
박귀천=대기업ㆍ공공부문은 주52시간 상한제를 잘 지키고 유연근무제도도 실시하는 등 앞서나간다. 반면 중소기업에선 근로시간 단축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유연화 얘기까지 나오니 혼란스러워한다. 근로시간도 양극화가 문제다. 유연화는 현장에 맞는 사례가 확산돼 자연스레 정착돼야 한다. 물론 정부의 임무는 근로시간 상한선에 대해 엄격히 규율하는 것이다. 또한 젊은 세대는 임금만큼이나 여가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노동자들이 시간을 주도할 수 있는 ‘시간주권’에 대한 제도적 설계도 필요하다.
이욱래= 근로시간을 어떻게 더 줄일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요즘엔 공장에서도 로봇이 일을 다한다. 공장 육체노동자를 상정한 전통적 근로시간 규제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유튜버가 일하는 방식은 16시간씩 촬영하고 편집한 뒤 나머지 며칠간 쉰다. 근로는 점점 그런 식으로 바뀌는데 그걸 막는 건 경쟁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릴 수 있다. 근로시간 규율은 하되 총량규제 쪽으로 접근했으면 한다. 하루 단위로 몇 시간만 일해라 식의 분절적 규제 방식은 점점 현실과 맞지 않을 것이다.
정흥준= 근로시간은 늘리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다. 시간을 많이 투여한다고 해서 경쟁력이 높아지느냐에 대해서도 논쟁이 여전하다. 다만 일 가정 양립에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유연근무제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대기업, 공공기관을 제외하고는 쓸 수 없다. 대면노동자, 필수노동자, 중소기업까지 이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가 과제다.
권순원= 일각에서 근로기준법을 ‘공장법’이라며 폐기하거나, 전면적으로 바꾸는 등 대안 모색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일본처럼 근로기준 부분은 그대로 두고 계약영역만 분리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해고 자유화’ 등 정치권 일각에서 나오는 주장을 반영한 입법은 위험하며 현실성도 없다. 물론 근로계약의 경직성을 완화해서 업무성과가 낮은 이들에 대한 인사관리를 유연화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박귀천=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대선공약으로 ‘신노동법(일하는 시민의 기본법)’을 내놓기도 하고 반대로 보수 정치인들은 해고를 완전히 자유화하자는 등 현행 근기법의 존폐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 하지만 헌법 32조 3항은 ‘근로 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 해석을 좀 유연한 쪽으로 판례를 형성하거나 일부 규정을 손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근기법을 함부로 개정하거나 폐지한다는 것은 헌법적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욱래= 1953년 근기법이 만들어진 건 농업 위주 경제를 공장제로 전환하면서 근로자 보호를 위해서였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근기법의 모든 규정이 강행규정이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형사처벌 조항이 너무 많다. 예컨대 퇴직금은 14일 이내 정산해야 하는데 계산 착오로 덜 주거나, 징계 중 감봉 규정을 잘못 적용해 덜 지급해도 모두 형사처벌 대상이다. 금품을 청산하면 처벌의사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조항을 신설한다든지, 시정을 안 하면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등 세련되게 바꿀 필요가 있다. 사용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근로자의 해고ㆍ휴직 등을 못 하게 하는 근기법 23조도 국제적 기준에 맞게 폭넓게 적용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억대 연봉을 받는 분이 수천만 원 받는 분들과 같이 (야간근로수당 등에서) 동일 기준을 적용받는 건 해결됐으면 한다.
권순원= 근기법 적용 유연성을 고려해 볼 필요는 있다. 미국의 경우 고소득자(연봉 10만7,432달러 이상)와 경영진 등은 초과 근로수당을 못 받는다. 일본 또한 연봉 1,076만 엔 이상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초과 근로수당을 받지 못한다. 고임금 노동자에게는 일부 내용의 적용 제외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노동계가 요구한 5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근기법 적용 또한 적극적으로 고려할 시점이다.
박귀천= 5인 미만 적용은 시대의 흐름이다. 다만 법 개정이 된다면 영세사업장에 계도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휴게시간의 유연화(근기법상은 4시간 이상 근무 30분, 8시간 이상 근무 1시간 휴게시간)도 필요하다. 가령 돌봄노동자의 경우 적정 휴게시간이 보장돼야 하나 어린이나 위급환자를 돌볼 때 갑자기 휴게시간이 되면 쉬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고도로 집중하는 업무나 육체적으로 힘든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2시간만 일하고도 휴식이 필요할 수 있다. 휴게시간 규정은 손질할 필요가 있다.
이왕구 논설위원ㆍ정혜린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