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 가슴에 꽂힌 탈북 청년 작가 이혁

입력
2021.09.28 18:00
23면
탈북 후 화가 꿈 접고 통번역 전공 
먼 길 돌고 돌아 다시 캔버스 앞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담은 작품 등
아트스페이스 이색서 개인전 열어


“영화 ‘왕의 남자’ 속 명대사인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를 들었을 때 가슴에 무언가 팍 꽂히는 느낌이 들었어요. 가까이에 있지만 서로 어긋나는 남북한 상황 같기도 하고, 가족의 일부가 북한에 있는 제 개인적 상황과도 닮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27일 서울 종로구 아트스페이스 이색에서 탈북 청년 작가 이혁(33)씨를 만났다. 이곳에선 그의 첫 개인전인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10월 6일까지)’가 열리고 있다.

북한의 예술전문학교에서 6년간 미술을 배웠지만, 그가 다시 캔버스 앞에 앉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6년 북한을 탈출, 중국에 머물다 2009년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그때만 해도 예술가의 꿈을 포기한 상태였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3년간의 준비 끝에 2013년 한국외대 영어통번역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오히려 기가 많이 죽었어요. 쟁쟁한 실력의 동창들을 보면서 좋은 회사에 들어간다 해도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죠. 졸업을 1년 앞둔 시점에는 진로를 원점에서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도 했는데, 혼자가 되니 돈은 좀 못 벌어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장 자신 있다고 판단한 게 미술이었고요.”

돌고 돌아 다시 미술로 왔지만,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씨는 2019년 홍익대 일반대학원 회화과에 진학하는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으로 사물을 재현하는 미술밖에 배우지 못했기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씨는 “특히 ‘모든 것이 미술이 될 수 있다’는 현대미술은 충격으로 다가왔다”며 “새로운 것을 알게 되니 한편으로는 좋았지만 혼란스러웠다. 그 사이에서 자리를 찾는다는 게 힘들었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20년이다. 대표적인 게 반상 시리즈다. 과거 가족들과 함께했던 밥상의 모습과 현재 홀로 마주한 자신의 밥상을 중첩해 표현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곳에 여행을 가면 잠깐 기쁘다가도 바로 어머니 생각이 나요. 한국에 와서 대학에 다닌다고 탈북해 부산에 계셨던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는데, 투병 중이셨던 어머니와 같이 살지 못한 게 지금은 너무 후회가 돼요.”


전시장 2층에는 북한에서 배우고 훈련한 기법을 고스란히 발휘한 작품도 걸렸다. 경남 하동을 배경으로 한 장마 시리즈 등이다. 현재 경남 하동군 소재 악양창작스튜디오 레지던스 입주작가로 있는 이씨는 “감정의 찌꺼기가 씻기는 기분이 들어 비를 좋아한다”며 “나만의 색깔을 찾아야 한다는 고민 없이 손 가는 대로 편안하게 그린 그림들도 전시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는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확장된 주제를 다루는 게 목표다. “우리나라가 나뉘어진 이유가 단순히 정치와 이념의 분열 때문만은 아니잖아요? 주변 강대국들의 이익이 개입한 것이죠. 예컨대 누구를 위한 이념이고, 전쟁이었는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 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채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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