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메르켈’ 시대를 맞이하는 독일에서 26일(현지시간) 치러진 총선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반전의 연속’이었다. 올해 초만 해도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중도우파 집권당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이 무난하게 정권 재창출을 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 이후부터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하더니 결국 ‘득표율 24.1%’라는 역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된 것이다. 반면 중도좌파 사회민주당은 두 달 만에 지지율을 10%포인트 이상 끌어올리며 16년 만에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사실 기민·기사 연합의 총선 패배는 메르켈 총리의 높은 대중적 인기를 감안하면 선뜻 납득되지 않는 결과다. 올해 1월 기민·기사 연합은 지지율 36%로 부동의 1위였다. 이들의 기세를 꺾은 건 여권 지도자들의 ‘마스크 스캔들’이다. 3월 기민당 소속 연방 하원의원과 원내 부대표, 보건장관 등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마스크 조달 사업에 개입, 업체들한테 거액의 뒷돈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며 여론이 매섭게 등을 돌렸다. 4월 기민·기사 연합 지지율은 10%포인트가량 추락하며 20%대로 내려앉았다.
그 사이, 녹색당이 날개를 달았다. 코로나19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진 탓이다. 40세 여성 안나레나 배어복 대표가 이끄는 녹색당은 4월 여론조사에서 기민ㆍ기사 연합을 추월하며 지지율 28%로 1위에 올랐다. 이때만 해도 사민당은 여전히 10%대 저조한 지지율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다만 녹색당은 배어복 대표의 소득신고 축소, 표절 논란 등으로 고전하며 상승세가 꺾였다.
뒤이어 기민ㆍ기사 연합에 또다시 대형 악재가 터졌다. 7월 대홍수로 200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집권당의 재난 대응 관리 능력이 도마에 올랐다. 특히 기민당 대표이자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가 수해 현장에서 농담을 하며 웃는 모습이 공개돼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당 지지율은 더 급락했다. 1949년 창당 이래 처음으로 득표율이 30% 밑으로 떨어지게 된 결정적 이유다. 라셰트는 이날 “내 잘못으로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반대로 사민당에는 위기가 기회가 됐다. 최저임금 인상ㆍ부유세 도입ㆍ노령 연금 장기 보장 등 사회개혁 정책으로 여론의 호응을 끌어내며 상승세를 탔고, 급기야 지지율 26%를 보이며 선두에 올랐다. 이번 대연정의 재무장관을 맡고 있는 올라프 숄츠 사민당 총리 후보가 발 빠르게 수해 지원금을 집행한 것도 주효했다. 그 결과, 사민당은 득표율 25.7%를 기록하며 16년 만에 원내 1당 자리를 되찾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오랫동안 메르켈의 인기에 편승해 온 여당이 오히려 유권자들과 멀어지면서 사민당의 입지를 넓혀 줬다”고 평가했다.
다만 ‘승리 선언’은 아직 이르다. 초박빙 승부에서 보듯, 향후 어느 당이 집권연정을 꾸릴지 장담할 수 없다. 오히려 주목되는 건 각각 3당, 4당에 오른 녹색당(득표율 14.8%)과 중도우파 자유민주당(11.5%)이다. 연정 구성 과정에서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킹메이커’로 등극했다는 얘기다. 4년 전 총선에서 12.6%를 득표해 제1야당이 된 극우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5위(10.3%)에 머물렀다. 뉴욕타임스는 “메르켈 총리의 퇴임에 유권자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를 잘 보여 준 선거 결과”라고 전했다.
이번 총선을 결정 지은 최대 변수로는 ‘기후변화’가 꼽힌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독일이 직면한 의제 12개 중 기후변화를 최우선 해결 과제로 지목한 응답자가 43%에 달했다. 실제 정치 진영을 초월해 각종 정책 발표나 연설에서 ‘기후’라는 단어 사용도 급격히 늘었다고 매체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