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자탄신일(孔夫子誕辰日) 소감

입력
2021.09.2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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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공부자탄신일’이다. ‘부자’는 ‘자’와 같은 말로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공부자’의 중국 발음에서 ‘Confucius’라는 ‘공자’의 서양식 이름 표기가 나왔다. 공자의 가르침인 유교는 ‘Confucianism’인데, 불교를 ‘Buddhism’이라고 하는 작명법과 같다.

당사자는 부탁도 안 했는데 중국 역대 황제들과 조선 임금들은 공자 제사, ‘석전(釋奠)’을 매년 지냈다. 지금도 ‘석전’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1년에 두 번 나랏돈으로 치른다. 무릇 받드는 사람이 있으면 욕하는 사람도 있는 법. 1999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유명세를 탄 저자가 ‘사서삼경’ 읽으라는 후속작을 내서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기실, 고려 말까지 공자는 존재감이 없었다. 안향(安珦, 1243~1306)은 ‘유감(有感)’에서 이렇게 말한다. “향불 밝힌 곳마다 부처에게 기원하고, 집마다 요란하게 귀신을 모시네. 겨우 두어 칸 공자님 사당, 뜰에는 사람 없고 봄 풀만 무성(香燈處處皆祈佛 簫管家家盡事神 獨有數間夫子廟 滿庭春草寂無人)”

고려의 일상에서 공자와 유교의 위상은 이처럼 미미했다. 그러나 주희(1130~1200)의 학문, 즉 주자학의 수입과 더불어 천지가 개벽한다. 주자학의 토대는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였고, 사서를 해설한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注)’는 혁명 같은 반향을 일으켰다. 주희는 ‘성(性)’과 ‘리(理)’를 강조했기에 ‘성리학’ 또는 ‘리학’이라고도 한다.

사서집주 덕분에 사서도 몸값이 올라갔다. 쟁쟁했던 유학자 정도전(1342~1398)도 25세에 맹자를 읽었을 정도인데, 그렇게 늦은 이유는 그제야 사서가 중시됐기 때문이다. 기실 사서는 모두 공자 사후에 나온 책이다. 실제 공자의 텍스트는 ‘오경(五經: 주역, 시경, 상서, 예기, 춘추)’으로, 공자 생전 교재의 모본이다. 한무제(B.C.141~87)가 유교를 국교로 삼을 때도 당연히 오경이 중심이었기에 ‘오경박사’가 생겼다.

우리도 이미 백제에 오경박사가 있었는데 고려 말부터 사서가 오경을 대체한다. 따라서 조선 유교는 ‘주희의 유교’였지 ‘공자의 유교’라고 보기는 힘들다. 또 순자, 동중서, 왕양명의 유교도 있었건만 조선왕조는 주희 말고는 모두 이단시했다.

주희의 학설은 앞 시대 경전 풀이와 얼마나 다른가. 지면상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만 보자. ‘학’의 속뜻은 주희 말대로 ‘본받다(效)’인가? 한나라 학자들 풀이대로 ‘깨닫다(覺)’인가? 대부분 ‘배우다’라고 풀지만, 부지불식간 주희 해석을 따른 것이다.

공자 생졸년(B.C.551~479)을 기준점으로, 한나라(B.C.202~A.D.220)와 주희가 살던 남송(1127~1279)을 견주어 보자. 객관적으로 어느 나라 사람이 공자 말을 더 잘 알아듣겠는가.

맹자(B.C.372~289)와 순자(B.C.298~238) 모두 유가(儒家)지만, 공자 그림자도 못 봤다는 점에서는 도긴개긴이다. 그런데 주희가 ‘사서집주’를 낸 뒤로 ‘순자’는 서자 취급을 받았다. 타당한가.

윤휴(1617~1680) 선생이 조선 지배층의 주자학 광기를 질타하셨다. “어찌 주자만이 공자의 뜻을 알겠는가.” 반응은 쇠귀에 경 읽기, 결과는 민생 파탄이었다.

중국과 일본도 유교식 관료제를 채택했으나 사회와 경제의 모습은 조선과 판이했다. 같은 유교에서 제국도 나오고 식민지도 나왔다. 공자 탓은 부질없다. 참, 생신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박성진 서울여대 중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