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을 앞두고 황금 노후를 준비한다는 50대 중·후반, 소방청 고위 간부였던 심평강(64)씨는 2012년 무사 퇴직 대신 '내부 고발'의 길을 택했다. 조직 최고 수장인 소방청장이 인사권을 남용하고 향응 수수 사건에 연루됐다며 감사원에 신고한 것이다. 직위해제 등 각종 불이익 조치를 시작으로 9년간의 끈질긴 싸움이 이어졌다. 대법원을 세 차례 드나들면서 심씨는 관련된 모든 소송에서 이겼지만, 그는 이미 계급(소방준감) 정년을 지났고 조직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소방청이) 승소 가능성이 없다는데도 계속 불복하는 걸 봤어요. 정권이 바뀌고 소방청장이 바뀌어도 조직은 그대로였어요."
한국일보는 공익신고자보호법 제정 10년, 부패방지권익위법 제정 20년을 맞아 참여연대, 정의당 배진교 의원실과 공동으로 국민권익위원회의 공익·부패행위 신고자 보호제도 운영 실태를 분석했다. 인터뷰에 응한 신고자들은 하나같이 "(권익위) 보호조치 결정을 받아도 이어지는 조직과의 싸움에서 심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신고자 보호가 형식과 제도를 넘어 제대로 작동하게끔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씨는 전북소방본부장으로 재임하던 2012년 3월 당시 이기환 소방청장의 비위 행위를 감사원에 신고했다가 같은 해 11월 9일 보복성 직위해제를 당했다. 심씨는 인사 조치가 있던 날 즉시 권익위에 신분 보장 보호조치를 신청했으나, 법에서 정한 결정 기한인 90일(60일+30일)이 넘어도 보호조치 인용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그사이 심씨는 계급 정년 퇴직을 4일 남겨두고 '공무원 품위 손상' 등을 이유로 해임됐다.
2013년 1월 감사원은 소방청장의 인사권 남용이 사실로 확인됐다는 결정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며칠 뒤 심씨는 소방청장에 대한 무고와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당했다. 2월 말이 돼서야 권익위는 부패행위신고자 심씨에 대한 신분 보장 조치 결정(징계 취소와 소방청장의 불이익 조치에 대한 과태료 1,000만 원 부과)을 내렸으나, 소방청은 권익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보호조치를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하며 긴 싸움에 돌입했다.
9년간 심씨와 관련된 세 건의 소송(①권익위 보호조치 취소 소송(본안) 성립 여부를 다투는 소송 ②본안 소송 ③무고 및 명예훼손 소송)은 모두 대법원 최종심까지 갔다. 심씨는 "처음엔 날 위해 증언해줬던 사람들도 나중엔 법정 등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모습을 보고 회의감을 느꼈다"며 "법적으론 모두 이겼지만, 서류 더미만 남았지 내 명예가 회복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9년이란 시간 자체가 너무나도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소방청은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불이익 조치 등에 대해 심씨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았다.
"퇴직 준비도 없이 갑자기 나와서 싸움을 시작했어요. 조직에서 매도되니 사람을 만나 구차하게 설명하기도 싫었어요. 모든 게 밝혀진 지금도 저랑 가까이 지냈던 직원들이 좌천됐다는 말이 들리고, 그때마다 가슴이 미어져요."
권익위가 배진교 의원실에 제출한 공익·부패행위 신고자 보호 실태 통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1년~올해 4월) 권익위 보호조치 결정에 피신고기관이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한 경우는 31.9%(전체 119건 중 38건)에 달했다. 특히 공공기관은 전체 취소 소송의 60.5%(부패행위신고자 보호조치 취소소송의 경우 85%)를 차지할 정도로 불복 비율이 높았으며, 한 중앙행정기관의 경우 취소 소송 재판에만 7년 9개월을 소요하기도 했다.
보호조치 취소 소송의 주체는 피신고기관과 권익위다. 정작 신고자는 본인의 명운이 걸린 소송에서 의견서 등을 제출하며 '보조 참가자' 역할에 그친다. 이 과정에서 권익위가 신고자와 '동지적 관계'일 거란 기대는 쉽게 무너진다. 심씨는 "(소송 당시) 권익위 담당 변호사와 협조가 되지 않아 자료 공유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변호사 자문을 기대할 수 없고 따로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없어서 의견서를 쓸 땐 직접 판례를 뒤져 준비했다"고 말했다. 그는 "권익위의 관료적 태도가 신고자들에겐 가장 큰 불안 요소중 하나"라고 성토했다.
취소 소송이 제기되더라도 권익위의 보호조치 결정은 계속 효력을 갖는다. 문제는 피신고기관이 이를 무시한다는 것이다. 권익위는 보호조치 결정에도 불이익 조치를 유지하는 기관에 1년에 2번 3,000만 원씩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지만, 최근 3년간 보호조치 미이행으로 적발된 31건중 권익위가 이행강제금을 부과한 건은 5건에 불과했다. 문은옥 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간사는 "보호조치 취소 소송이 진행 중일 경우 권익위가 패소 시 반환 소송을 우려해 이행강제금을 부과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소극 행정의 전형"이라고 지적했다.
부패 행위의 핵심이라고 할 법한 청탁금지법 위반 신고의 경우, 공익신고자보호법 준용과 관련된 입법 미비로 보호조치 이행강제금 부과 대상에서 아예 빠져 있다. 정부는 올 2월에야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탁금지법 위반 기관이나 공직자에게도 보호조치 미이행 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청탁금지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배진교 의원은 "신고자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장치 중 하나가 이행강제금인데도 적용 범위에 사각지대가 있던 부분은 매우 유감"이라며 "29일 개정안이 정무위원회를 통과했는데, 연내 본회의 처리를 위해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기관의 공익침해 행위가 사실로 드러났는데도 합당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을 경우에도 공익신고자가 느끼는 무력감은 막대하다. 긴 소송전을 감수하고 택한 공익신고의 목적 자체가 퇴색하기 때문이다.
KT 직원 이해관(58)씨는 2012년 2월 "KT가 ‘제주 7대 자연경관선정 투표’에서 국내전화를 국제전화로 속여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가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받고 경기 가평지사로 전보됐다. 이후 회사는 병원에 디스크 치료를 받으러 간 이씨를 '무단 결근' 했다며 해고했다. 이씨는 권익위에 신분 보장 보호조치 신청을 했고, 이어진 소송에서 정직·전보·해고가 모두 부당하다는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아 2016년 복직했다.
4년여의 소송 끝에 이씨는 회사로 돌아왔지만, KT는 전기사업기본법 번호관리 세칙 위반으로 방송통신위원회에 350만 원의 과태료를 지불했을 뿐 형사 책임은 지지 않았다. 시민단체가 KT를 사기죄로 검찰에 고발했으나 '200억 원대 이익금을 제주도에 기부했기에 부당이득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KT 측 주장이 받아들여져 무혐의 처리됐다
이씨는 이런 결말에 큰 허탈감을 느꼈다. 그는 "기업이 공익침해 행위를 하고도 수백만 원대 과태료를 내는 것에 그친다면, 사회가 공익신고보다 부당이득을 권하는 게 아니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권익위는 직접적 수사 권한이 없어 기관에 자료 요청을 해도 거부당하면 별수 없다"라며 "강제수사권을 부여하는 등 제도 개선을 통해 공익침해 경로와 부당이득을 지금보다 더 철저히 가려낼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