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러분께 새롭게 규명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게 되어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삼천 년 전인 21세기 말 기후위기로 인한 대멸종이 있었습니다. 이 대멸종의 시대는 지구상에 살고 있던 대부분의 인간은 물론 인간의 역사 또한 소거해 버렸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대해서 알고 있는 유일한 역사적 사실이란 예전에 이 땅이 '코리아'라고 불렸다는 게 전부입니다. 이 땅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극소수의 생존자들로부터 전해진 민담이 다입니다. 이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저희 학자들은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5년 전, 저희 연구팀은 서불 사막의 지층에서 고대 도시 서울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 '문서'라고 알려진 자료를 발굴해냈습니다. 그 '문서'는 넓게 펼칠 수 있는 종이에 촘촘하게 매일 일어났던 온갖 범죄를 기록해 놓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연구팀은 '문서'의 해독에 매달렸고, 드디어 '코리아'라고 불리던 이 땅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21세기 코리아에는 다양한 종족이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코리아의 주류 종족은 '한국인'이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은 지금 이 땅에 한국인들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문서'에 기록된 여러 사건에 대해 들어보시면 수긍하실 겁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해독해낸 기록은 아이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키우는 어린이집이라는 시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서'에서는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학대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계속 발견됩니다. 그래서 연구팀은 학대자들이 어느 종족에 속해 있는지를 조사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한국인이었습니다. 이 발견은 우리가 문서 속 범죄 사건의 범인들이 어떤 종족에 속하는지를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구팀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학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를 살펴보았습니다. 충격적이게도 이 사건의 부모들 역시 모두 '한국인'이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문서'에는 남녀 관계가 틀어져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합니다. 그런데 '소오름'. 이 사건의 가해 남성들도 모두 '한국인'이었습니다. 더 섬뜩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한국인 남성들은 약 2년간 군대에서 살인 기술을 연마한 '전쟁 기계'였다는 점입니다.
상황이 이러니 살인 사건이 난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되실 겁니다. 실제로 많은 살인 사건들, 심지어 연쇄 살인 사건들도 많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들의 범인들이 어떤 종족이었는지 이제는 짐작하시겠지요? 네 맞습니다. 이런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킨 살인범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인'들이었습니다.
'문서'에 기록된 자료 분석을 통해서 저희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삼천여 년 전, 코리아라는 땅의 모든 한국인이 범죄자는 아니었겠지만, 모든 범죄자들은 한국인이었다.' 이게 제가 여러분에게 지금 이 땅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있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그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생각하기도 싫지만 한번 상상해 봅시다. 아이들은 한국인들에게 학대당했을 것이며, 여성들은 한국인들에게 유린당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군대에서 익힌 다양한 살상 기술을 이용해 테러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물론 한국인들은 그들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의 문제라고 항변했겠지요. 하지만 속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단일 민족, 단일 언어 사용을 종교처럼 떠받드는 종족이어서, 다른 민족, 다른 문화, 다른 언어에 극도로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지금 있었다면 '떼거리'로 뭉쳐 다니면서 우리를 위협했을 것입니다. 처음 소수일 때는 착한 척 본색을 숨기고 있다가 다수가 되어 세를 얻으면 모든 것을 한국화시키려고 했겠지요. 이제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다면 저는 한국인들을 잠재적 범죄자라고 규정하고, 이 땅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지요. 그들은 혐오받아 마땅한 집단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삼천여 년 뒤 한 역사학회의 발표장을 상상해 보자. 몇 장의 신문 자료를 가지고 어느 역사학자가 21세기의 한국인들을 이렇게 평가한다면 어떻겠는가? 이 글이 SF소설이었다면, 독자들 중 백이면 백은 이런 상상에 대해 말도 안 되게 허접하다고 따질 것이다. 이런 비난에 대해 나는 반박할 생각이 없다. 위에 써 놓은 이야기들은 몇몇 개인의 과오를 집단 전체의 속성으로 치환시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진짜 '헛소리'니까.
그런데 왜 이런 '헛소리'를 길게 썼냐고? 2021년의 한국에서 이런 '헛소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SNS에서는 무슨 사건·사고의 내막을 알고 보니 조선족이 개입되어 있더라는 카드 뉴스가 '소오름', '반전'이라는 말과 함께 떠돌아다닌다. 경북대 근처의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둘러싸고는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모든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다'라는 혐오 현수막이 버젓이 내걸린다.
당신은 이런 헛소리에 동의하는가? 좋다. 당신은 이런 헛소리에 '좋아요'를 누를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당신은 앞에 내가 길게 써 놓은 헛소리에도 동의해야 한다. 내 헛소리에 따르면 한국인인 당신은 잠재적 아동학대범이고, 잠재적 폭력배이다. 그것뿐인가? 당신은 잠재적 성폭력범이고, 잠재적 테러리스트이다. 외국에서는 이런 잠재적 범죄자들에게 이민의 길을 열어주지 않으니 꿈에라도 이민 생각은 하시지 말길 바란다. 혹여 해외에서 인종차별을 받더라도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하시라. 한국인치고 착하다, 한국인인데 폭력적이지 않다라는 말을 들어도 군소리하지 말고.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지금 이 땅에는 이런 종류의 헛소리를 매일 들으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들과 갈등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그런 갈등을 모른 척하자는 게 아니다. 낯선 것, 나와 다른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나와 다른 문화, 다른 세계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반드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문제로 인한 불편함과 갈등을 '혐오의 헛소리'라는 눈가리개로 덮어버리면 진짜 문제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혐오의 헛소리'가 카드 뉴스와 같은 구체적이고 규격화된 텍스트 유형의 꼴을 갖추고 아무런 거부감 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것이 우려스럽다. 텍스트 유형은 복잡한 세상의 정보를 특정한 틀에 맞추어 받아들이게 하는 사회적 인식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틀이 '상식'으로 작동되기 시작하면 텍스트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구체적으로 뜯어보고 함께 고민해야 할 사회 문제들을 '아 됐고, 이슬람은 다 그래.' '아 됐고, 또 조선족이야?' '아 됐고, 이주 노동자들은 항상 말썽이야'라는 식으로 가공하고 소비하게 된다.
텍스트 소비자 입장에서 이런 텍스트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도덕적 우월감과 타 집단을 평가할 수 있다는 권능을 가졌다는 효능감을 텍스트의 향유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헛소리 텍스트는 철학자 레나타 살레츨이 말한 '무지에 대한 열정'을 충족시켜 준다. 어지럽게 꼬여 있는 갈등의 현장을 보면 우리는 이렇게 속으로 되뇌일 것이다. '알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아.' 이때 혐오의 헛소리 텍스트는 난마처럼 얽힌 현상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고 선명하게 정리해 준다. 복잡할 거 하나도 없어. 다 쟤네가 나쁘고 이상해서 그런 거야. 쟤네만 없어지면 돼. 어때 참 쉽지? 나는 한국 사회 전체가 이처럼 '무지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는 담화 공동체가 되어 가는 것이 두렵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문제를 직시하는 시선이나 문제에 대한 질문 자체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답을 찾을 것이다'라는 밈이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이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해 새로운 행성을 찾아 나서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혐오의 헛소리가 활개를 친다면 나는 비장하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국 사회는 결국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내 말은 그러니까, 질문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답을 찾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