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6월 12일 오전 7시 15분,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샌프란시스코 앨커트래즈 연방교도소. 간수장 빌 롱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침 점호 알람이 울린 지 한참 지났는데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감방 세 곳의 수감자들을 깨우려 창살 사이에 손을 넣고 베개를 흔드는 순간, 갑자기 사람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진 탓이다. 화들짝 놀란 롱이 뒤로 넘어지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죄수 세 명은 온데간데 없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머리 모형만이 텅 빈 침대에 덩그러니 놓였을 뿐이다. 사라진 사람은 마약과 무장강도 등 혐의로 1960년 이곳에 들어온 프랭크 모리스(당시 36세)와 존(당시 32세)ㆍ클라렌스(당시 31세) 앵글린 형제다. 미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탈옥이자 현실판 ‘쇼생크 탈출’로도 알려진 ‘앨커트래즈 탈옥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샌프란시스코 해안에서 2.4㎞ 떨어진 작은 바위 섬, 앨커트래즈. 사람들은 이곳을 ‘악마의 섬’으로, 정상에 위치한 교도소는 ‘절대 탈옥할 수 없는 종신(終身)감옥’이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앨커트래즈 교도소는 화려한 샌프란시스코 도심이 한눈에 보일 만큼 지척에 있음에도 빠져나가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차갑고 거친 태평양 바다가 섬을 둘러싸고 있는 데다, 해안은 41m 높이의 절벽으로 이뤄져 있다. 바다로 몸을 던진다 해도 암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가까스로 물속에 뛰어들어도 안심할 수 없다. 영상 7~10도의 차가운 물, 빠른 해류로 수영이 힘든 것은 물론, 식인 상어 떼도 도사리고 있다. 탈옥 시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전설적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 등 악명 높은 범죄자들이 주로 수감됐던 이유다. 물론 탈출의 몸부림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교도소가 운영된 29년(1934~1963년) 동안 총 14번(인원 수 36명)의 탈옥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붙잡히거나, 총에 맞아 숨지거나, 차디찬 바다에서 익사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은 대체 어떻게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을까.
교도소 B블록 내 인접한 감방에 각각 배정된 모리스와 앵글린 형제, 그리고 또 다른 수감자 앨런 웨스트 등 4명이 탈옥을 위해 머리를 맞대기 시작한 건 1960년. 그러던 중 이듬해 12월, 웨스트가 감방 바로 뒤, 설비물이 설치된 좁은 통로를 청소하다가 낡은 나사 부품을 발견하면서 막연한 아이디어가 구체화됐다.
계획은 이랬다. 90㎝ 너비의 설비 통로와 연결되는 감방 벽을 뚫어 통과한 뒤 환풍구를 이용, 교도소 옥상까지 올라가는 걸 1차 관문 통과로 삼았다. 벽을 뚫는 데에는 식당에서 훔친 포크와 숟가락을 이용하기로 했다. 숟가락 머리 부분을 잘라 송곳 모양으로 만들고 매일 밤 감방 벽의 환기구 주변을 파냈다. 진공청소기 모터도 몰래 빼내 만든 전동 드릴도 동원했다. 교도소에서 매일 1시간30분씩 울린 아코디언 연주 소리가 드릴 소음을 교묘히 숨겨줬다.
준비 과정도 치밀했다. 구멍을 가릴 ‘가짜 벽’을 만들어 의심을 피한 게 대표적이다. 낮에는 사람들 발길이 뜸한 옥상 헬기착륙장을 청소하겠다고 간수들에게 간청해 옥상으로 올라간 뒤, 버려진 우비 50여 벌로 구명조끼와 고무보트(1.8m×4.2m 크기)를 만들기도 했다. 아코디언을 개조, 고무보트에 공기를 주입할 채비까지 갖췄다. 머리 모형 제조에는 종이와 비누, 석고를 썼다. ‘디테일’을 위해 이발소에서 주운 머리카락도 붙였다.
실제 탈옥을 감행한 ‘거사’는 1962년 6월 11일 소등 직후인 오후 9시30분 이후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가짜 머리를 침대에 올려두고, 이불 속에 수건과 옷가지를 넣어 잠든 것처럼 꾸며놓고 나서 당초 계획대로 옥상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이후 배수관을 타고 41m 아래 검푸른 바다로 몸을 던졌다. 다만 한 사람, 웨스트는 자신의 감방 속 벽면 환기구를 제시간에 제거하지 못해 홀로 남겨졌다. 모리스와 앵글린 형제 등과 보조를 맞추고자 필사적으로 벽을 허문 웨스트가 가까스로 방을 빠져나갔을 때, 동료 3명은 이미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이튿날 아침, 앨커트래즈는 발칵 뒤집혔다. 열흘간 군경 100여 명이 동원된 사상 최대 규모 추적대가 하늘과 땅, 바다를 샅샅이 뒤졌지만 허탕이었다. 북쪽으로 3.2㎞ 떨어진 앤젤아일랜드 인근에서 탈출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노와 앵글린 형제 소지품이, 금문교 인근에선 보트 잔해로 보이는 우비 조각 등이 발견됐지만 거기까지였다. 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주 뒤, 죄수 복장과 비슷한 파란색 옷을 입은 한 남성의 시신을 샌프란시스코 해안 인근에서 찾아냈으나 심하게 부패된 탓에 신원 확인은 불가능했다.
1979년 12월 31일, 미 연방수사국(FBI)은 ‘탈옥 3인조’에 대해 ‘실종 및 익사’ 처리를 하고, 17년이 넘었던 수사를 종결했다. 당국은 “보트가 부서져 가라앉았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세 사람의 시신은 샌프란시스코만 급류에 휩쓸렸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감옥에서는 벗어났으나, 끝내 육지를 밟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 같은 FBI 결론에도 불구, 일부 음모론자들은 앨커트래즈의 ‘탈출 불가’ 신화를 유일하게 깨뜨린 세 명의 죄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다. 우선 탈옥과 비슷한 시점에 샌프란시스코 해변에서 괴한들의 차량 강탈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의 소행일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FBI가 ‘무관한 사건’이라고 못 박았지만, 그럼에도 ‘생존설’은 끊이지 않는다. 이렇다 할 구체적 근거가 없긴 해도, 간접 정황에서 기인한 심증일 뿐이라 해도, 그들의 ‘사망’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앵글린 형제의 가족도 그들의 생존을 믿는다. 형제의 모친이 수년간 카드 없이 배달된 꽃을 받았다는 게 핵심 근거다. 두 형제가 1973년 여성으로 변장해 모친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형제한테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인이 찍힌 엽서를 받았다”고 말한 친척도 나타났다.
2008년 디스커버리채널의 ‘실험’도 이들의 생존설에 힘을 보탰다. 1960년대 당시 교도소 안에서 구할 수 있었던 비옷으로 만든 보트 등을 준비해 똑 같은 탈옥 시도를 해 봤더니, ‘바다가 잠잠하고 근처 조류를 잘 안다면 탈옥 후 육지에 도착했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다만 미 연방교도소관리국(FBP)은 “식단 조절이 어렵고, 윗몸일으키기와 팔굽혀펴기 외엔 별다른 체력 단련도 하지 못했을 것이며, 밀물과 썰물에 대한 지식마저 없는 죄수들의 탈옥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선을 그었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2018년, 의문 해소를 위한 ‘합리적 실마리’가 드디어 나타나는 듯 보였다. 자신을 ‘존 앵글린’이라고 밝힌 인물의 편지가 공개됐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 리치먼드 경찰국에 보내진 이 서한은 5년간 꽁꽁 숨겨져 있다가 지역방송국 취재로 그 존재가 드러났다. 편지에는 △세 사람이 육지에 무사히 도착했고 △시애틀과 노스다코타를 거쳐 현재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살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또 “모리스와 (내 동생) 클라렌스는 각각 2008년, 2011년에 숨졌다. 나도 암에 걸렸다”고도 적혀 있었다. 아울러 “당국이 1년 이하의 징역과 치료를 방송을 통해 약속한다면 정확한 내 위치를 알려주겠다”는 제안도 포함됐다.
발송인의 요구는 실현되지 않았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FBI는 지문과 필체, 유전자(DNA)까지 조사했지만 “(발송인이 누구인지) 불확실하다”고 판단했다. 편지의 진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으면서 60년 가까이 해결되지 못한 사건은 또다시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사건은 아직도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다. 법무부 산하 연방보안국은 탈옥범 추적을 접지 않고 있다. 2003년 FBI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마이클 다이크 보안관은 4년 후 미 공영라디오 NPR 인터뷰에서 “그들이 숨졌다는 증거가 없다. 사망을 공식 확인할 때까지는 그들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이크는 2019년 은퇴했지만, 당국은 여전히 사건을 그에게 일임하고 있다. 현재 FBI 홈페이지에는 “공유할 단서나 정보가 있으면 다이크에게 연락해 달라. 앨커트래즈 사건은 우리 모두가 풀고 싶은 미스터리”라는 문구와 함께 그의 연락처가 올라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