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빼앗긴 비운의 황제, 고종은 어떤 마음으로 덕수궁에서 살았을까. 고종이 승하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그가 눈을 감았던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이 꿈 꿨을 상상의 정원이 펼쳐진다. 정원을 주제로 덕수궁을 재조명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 이야기다.
애니메이터 이용배와 조경학자 성종상은 함녕전에서 역사적 이유로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던 고종을 생각하며 그가 꿈꾸었으나 만들지는 못한 이상적인 정원을 영상으로 구현했다. 함녕전은 평상시엔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이지만, 이번 전시를 위해 개방됐다. 나비가 날아다니는 상상 속 정원에선 고종이 미소를 짓는다.
맞은편 건물은 식물학자 신혜우의 작업물로 채워져 있다. 덕수궁에 사는 식물을 조사하고 채집한 그는 덕수궁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식물 표본, 그림 등으로 표현했다. 그 중에서도 작가의 키만큼 자란 망초의 표본이 눈길을 끈다. 외래종인 망초는 대한제국이 망할 무렵 전국으로 퍼져 나간 풀이라, 나라를 망하게 하는 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고종이 휴식 공간으로 사용했다는 정관헌과 접견실로 사용된 덕흥전 사이에는 실내에서 사용하는 카펫이 놓였다. 김아연 작가는 석조전 접견실의 카펫 문양과 덕수궁 단청 문양을 연구해 ‘가든카펫’을 만들었다. 꽃이 수놓아져 있는 카펫은 살아있는 식물로 둘러 쌓여 있는데, 카펫 위에 올라가면 새로운 느낌의 정원을 느낄 수 있다.
석어당에서는 가짜지만 진짜 같은 꽃을 볼 수 있다. 무형문화재 황수로가 고종에게 헌화된 채화(궁궐을 장식하고 궁중 의례 등에 사용한 화려한 조화) 중에서도 왕의 권위와 위용을 상징하는 도화를 선택, 전통적인 기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왕의 장수를 꿈꿨던 조선 왕조는 궁궐에서 생화를 꺾어 실내를 장식하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김명범 작가는 괴석 옆에 사슴 조형물을 설치했다.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괴석은 조선시대 궁궐에서 비중 있게 취급되는 조경물 중 하나인데, 작가는 불로장생의 또 다른 상징인 십장생 가운데 사슴을 괴석 옆에 둬 초현실적인 풍경을 연출하고자 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은 조선시대 여성의 모습을 그린 나무 조각을 석조전 정원 잔디밭에 설치했다. 그는 당시 극소수만 들어올 수 있었던 궁궐이 공공장소로 개방되고, 그곳에 조선시대 일반 여성이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을 중요 사건으로 봤다.
주목 받지 못했던 존재에 집중한 작품도 눈에 띤다. 권혜원 작가는 덕수궁 정원에서 정원을 가꿨을 이들을 상상했다. 정원은 남았지만, 그것을 가꾼 이들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없다는 점을 눈 여겨 본 것이다.
이 밖에도 날씨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설치물(지니서의 ‘일보일경’)과 휴대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화면에 상상의 정원이 펼쳐지는 이예승의 ‘그림자 정원: 흐리게 중첩된 경물’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추석 연휴 기간(9월 20~22일)에도 전시는 이어진다. 전시는 11월 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