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 이야긴데 우리네 명절 같은 이 공감은 대체 무엇? 

입력
2021.09.25 10:00
17면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팬데믹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한 추석 연휴 동안 명절을 함께 보낼 가족이 있어 행복했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가족이 있어서 삶에 무게가 더해졌던 사람들을 위해 가족 영화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여기서의 가족 영화란 팬데믹 이전 명절 극장에서 관객을 모은 후, 이후 몇 년 동안 TV 특선 영화로 보고 또 볼 수 있는 영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 전부가 볼 수 있고, 가족과 이웃, 사람 사이의 정과 사랑,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사연과 서로를 향한 마음이 있는 영화 말고, 가족이란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다.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 '시스터후드'에서 명절마다 언급하는 작품은 아리 애스터 감독의 '유전'이다. 제목에서부터 강렬한 가족 영화의 기운이 느껴진다. 한 가족 사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유전의 정체는 무엇일까?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과연 좋은 것, 의미 있는 것이기만 할까? 악령의 저주가 유전되는 가족 사이의 관계를 통해 '물보다 진한 핏줄'이 가진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 작품으로는 배우 김윤석의 첫 연출작인 '미성년'이 있다. 불륜으로 혼외자를 갖게 된 한 남자를 두고 아내와 내연녀가 갈등하는 내용이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한 아버지와 어른의 방식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두 어머니 사이에서, 가족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는 건 미성년인 양쪽 집의 딸들이다. 영화는 이들을 통해 책임지고 기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 찢어지고 무너지는 관계 속에서, 사랑이나 정으로 대충 뭉뚱그려지지 않는 복잡한 감정과 그 진폭에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답은 더 선명히 드러날 수 있다. 물론 이런 영화를 가족 영화라고 모인 자리에서 함께 봤다가는 의만 상할 수 있으니까 주의가 필요하다.


7일 왓챠에서 공개된 영화 '시바 베이비' 역시 이런 의미에서 명절에 어울리는 가족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대니얼(레이첼 세노트)은 부모의 강권으로 잘 알지 못하는 이웃의 장례식 뒤풀이에 참석한다. 장례식이 아닌 뒷풀이 자리에 겨우 나타난 데서 이미 대니얼에게 이 행사가 얼마나 고역인지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니얼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엇에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 바로 질문이다. 일가친척과 오랜 이웃, 부모님이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한 자녀 세대의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건 딱 두 가지다. 음식과 질문. 대니얼에게는 질문하는 사람들이 만족스러워하고 부모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답이 없다. 취업에 관해서도 결정된 게 없고, 전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지나치게 긴 설명이 필요하며, 남자친구도 없다.

딸의 답 없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 대니얼의 엄마는 약간의 모범 답안을 준비한다. 취업을 위한 면접을 앞두고 있다는 식이다. 아무래도 부실한 답변을 들고 질문이 화살처럼 쏟아질 장소로 가려는데, 소꿉친구이며 한때의 애인이었던 동성의 친구 마야(몰리 고든)도 그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일가친척과 이웃들이 평생 대니얼과 비교해 온 마야는, 무려 로스쿨에 합격한 상황이다.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장례식 이후 행사가 진행된 크지 않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예상된 모든 질문과 시선은 대니얼을 둘러싸기 시작한다.


'시바 베이비'는 가족 영화이면서 동시에 명절 영화이기도 하다. 명절에 어울려서가 아니라 명절과 비슷한 꼴을 한 수많은 가족과 소공동체 중심의 행사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떄문이다. '시바'는 유대인의 장례 의식을 의미하는 단어로, 명절은 아니지만, 가까운 일가친척, 이웃과 지인이 한자리에 모인다는 점에서 상황적으로 명절과 비슷하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무사와 안녕을 축하하느냐, 아니면 슬퍼하고 애도하느냐가 차이일 뿐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이는 일 자체가 달갑지 않은 형편이나 세대의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축하나 애도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이미 느꼈겠지만, 대니얼이 처한 상황은 한국 명절에서 자녀 세대가 종종 처하는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팬데믹 이전, 3대 이상의 가족이 모였던 명절 풍경을 떠올려본다면 거의 비슷할 것이다. 질문의 레퍼토리는 나이대별로 준비되어 있고,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은 모두 비교의 대상이 된다. 때로는 돌려서, 때로는 노골적으로 자식 자랑이 이어진다. 고등학교 졸업, 대학 입학, 대학 졸업, 취업, 연애와 결혼, 출산으로까지 이어지는 정상성의 연쇄 고리 안에서도 학벌과 전공, 직업의 종류, 결혼을 둘러싼 권력 관계와 아기의 성별까지 비교와 평가의 기준은 더욱더 촘촘해진다.

명절을 비롯한 가족 행사는 대체로 정상성을 무사히 확인받고 통과하는 의례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명절이 축하하는 무사와 안녕은, 모두가 무사히 정상, 보통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는 안전함에 대한 확인이다. 그 속에서도 나와 내 가족은 비교에서 우위를 선점했음에 안도하고 싶어하는 심리가 모임 안에서 작동될 때, 그 트로피가 되어야 하는 자녀 세대의 고통은 두 배로 가중될 수밖에 없다.


'시바 베이비'는 정확히 이런 상황에 놓인 대니얼을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가둬둔 뒤, 몰아붙인다. 온갖 무례한 질문들과 집요한 품평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한층 고통스러운 상황이 펼쳐진다. 장례식 당일 아침까지도 만났던 남자가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다. 그냥 만난 게 아니다. '슈가 대디'라는 앱을 통해 성관계를 맺고 돈을 받기 위해서 만났던 남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남자의 아내가 아기까지 데리고 장례식장을 찾으면서, 대니얼은 옴짝달싹 못 한 채로 극도의 긴장 속에 갇혀 있게 된다.

흥미로운 게 있다면, '시바 베이비'의 영화로서의 매력이 거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장편으로 확장되었지만 러닝 타임 7분의 동명 단편 영화였을 때와 줄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영화가 코미디를, 그리고 호러를 만드는 방식은 모두 보는 사람이 대니얼과 같은 긴장을 느끼고 있는 데서 온다. 대니얼을 계속 따라다니는 카메라는 내가 마치 대니얼이 되어 집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자, 이제 나는 대니얼이 되어서 무례한 질문을 현명하게 반사하고, 뒤에서 헐뜯고 욕하는 말들이 안 들리는 척해야 하며, 사교적이고 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는 엄마의 요구에 맞추어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동시에 복잡한 감정이 들게 하는 옛 애인이자 친구와 기 싸움도 해야 한다. 꼴 보기 싫은 남자와 그의 아내의 속을 미묘하게 긁으면서도 앱을 통해 남자들을 만나서 용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걸려서는 안 된다.

대니얼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순간에는 어처구니없이 힘 빠지는 웃음이 터지지만 어떤 순간에는 머리가 설 정도로 긴장이 되고, 그 모든 감정을 느끼느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피곤하다. 그리곤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명절이란 원래 이런 것이었지! 심지어 러닝타임이 보통 영화보다 상당히 짧은 78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두 배쯤 되는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명절에 낯선 큰집의 한구석에서 보내는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영화를 가족과 함께 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명절마다 찾아오는 질문 세례가 너무 끔찍한데도 아직 부모님 중심의 공동체를 벗어나지 못한 누군가가 있다면, 인생의 80분 정도를 투자해보기를 추천한다. 돈을 줘도 싫은 명절 체험을 왜 해야 하는지 궁금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풍경이 한국에만 펼쳐지는 게 아님을 잘 만든 영화로 확인하는 일은 의외로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

영화를 보며 나의 어린 시절을 지나치게 생생하게, 그 와중에도 과장해서 기억하면서 과거의 어린 나를 소환해 현재의 나와 비교했던 무례한 몇몇 어른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자막도 잘 안 보이는 나이가 되었으며 나의 세상에 더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고 평온해졌다. 이런 걸 깨닫게 해주는 영화야말로, 진짜 가족 영화, 명절 영화가 아닐까?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을 생각하고 명절의 의미를 돌아보되, 필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은 삼키고 거리를 두는 일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추석이었기를.

윤이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