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장애인화장실만 '남녀공용'일까

입력
2021.09.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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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공용은 언제나 불안해요. 장애인화장실은 자동문이다보니, 착오로 문이 열릴까봐 용변을 볼 때 노심초사하게 되기도 하고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문모(34)씨는 외출할 때마다 ‘화장실 수난사’를 새로 쓴다. 입구가 협소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는 경우부터, 무단 흡연을 막는다며 아예 잠가버린 경우까지, ‘자격 미달’ 장애인화장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하게 겪는 수난은 '남녀공용' 장애인화장실을 이용할 때다. 장애인화장실은 보통 자동 출입문이 설치돼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버튼 조작을 잘못하면 문이 열릴 수 있다. 용변을 보는 모습이 그대로 노출될 수도 있는 장애인화장실이 남녀 공용이라니.


장애인화장실의 ‘남녀 공용’ 문제는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비장애인화장실은 여성용과 남성용을 분리하는 게 ‘당연’한 데 반해, 장애인화장실은 남녀공용으로 설치하는 것이 차별이라는 지적이다. 장애인을 ‘무성’의 존재로 대상화한 결과, 화장실을 존엄하게 이용할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2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전남 지역 지자체들을 상대로 제기된 진정 사건에서 ‘장애인 화장실을 남녀공용으로 설치한 것은 차별이 맞다’는 판단을 내리고 시정을 권고했다.


서울 지하철 1~4호선에 설치된 장애인화장실 중 남녀공용은 △2호선 용답역 △2호선 신설동역 △4호선 미아역 △4호선 한성대입구역 △3호선 옥수역 등이다. 시설이 노후한 일부 역사는, 자동식 개폐 시스템 고장으로 화장실 이용 자체가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3호선의 경우 2017년까지만 해도 대다수 장애인화장실이 ‘남녀공용’이었다가 이후 순차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상당 부분 개선됐다. 그러나 간신히 남녀 분리만 됐을 뿐, 여성용 장애인화장실의 ‘위치’를 잘못 설치한 경우도 많다. 구파발, 신용산, 잠원역 등 일부 역사의 여성 장애인화장실이 남성용 비장애인 화장실 통로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장애인 여성이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비장애인 남성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남자 화장실 입구와 통로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여성 장애인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구조다.



서울 교통공사 관계자는 "기존에 있던 화장실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공간을 더 넓힐 수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성용 화장실 쪽에 장애인 화장실을 몰아 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정해진 예산 범위 내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는 하나, 여성 장애인이 느낄 불쾌감과 수치심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문씨는 “여성 장애인화장실이 남성용 화장실 안에 들어가 있는 경우를 다른 공공시설에서도 자주 목격했다”며 “비장애인 남성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환경이다 보니 아무리 용변이 급해도 들어가는 것 자체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휠체어 장애인 크리에이터(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 운영) 김지우씨는 본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에 4호선 신용산역 화장실 사진을 업로드하고 “(용변을 보기 위해) 남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곤욕”이라며 “화장실을 이용하는 내내 경계하며 자동문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썼다. 이후 여성 장애인들의 시설 개선 민원이 빗발치자 해당 역사 입구에 칸막이가 등장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서울교통공사 등을 상대로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그나마 공공시설은 나은 편이다. 지하철역사나 관공서를 벗어나면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터치식 자동문이 고장났는데도 장기간 수리하지 않고 방치하거나, △창고도 아닌데 청소 도구나 우산빗물제거기와 같은 잡동사니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장애인화장실 표시만 돼 있을 뿐, 필수 설비는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 장애인화장실을 건축 승인을 위한 구색 맞추기로 설치하다 보니, 진입 램프 대신 계단을 설치해 휠체어 진입이 아예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개인 소유 건축물의 경우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주기적인 시설 점검 대상이 아니다. ‘유지 관리’에 대한 상위법이 따로 없으니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라도 단속할 방법이 없다. 오직 건물주의 ‘선의’에 기대야만 한다. 지난 2019년 세종시 일대 ‘장애인화장실’을 직접 답사하며 ‘지도’를 만들어 화제가 됐던 김모(50)씨는 “공론화 이후 2년이 흘렀지만 근본적으로 크게 바뀐 건 없다”며 “멀쩡한 화장실이 닫혀 있어 문제 제기를 하면 ‘사유재산인데 무슨 권리로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며 쫓겨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나마 지금은 김씨의 사연이 널리 알려지면서 10개 중 9개꼴로 닫혀 있던 장애인화장실 중 절반 이상이 개방됐다.



문씨는 “활동보조인이나 보호자의 성별이 다를 경우, 함께 화장실 내부로 접근하는 게 힘들 수 있다”며 “가장 좋은 방법은 비장애인 화장실과 장애인용 남녀 화장실 입구를 따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하다 못해 반려견도 용변 볼 자리가 따로 있는 마당에 아직까지 장애인들이 마음 놓고 다닐 장애인화장실이 터무니없이 적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며 “하다 못해 네이버 지도나 카카오 지도에 ‘장애인화장실’ 유무라도 표시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지윤 기자
김지우 인턴기자
한아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