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무슨 물건입니까. 팔리고 안 팔리고 하게.”
투박하고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직선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말이었다. 배우 황정민이 2006년 10월 부산에서 열린 ‘스타 서밋 아시아’에서 보인 반응이었다. ‘스타 서밋 아시아’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주요 배우들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였다. 영화제를 찾은 각국 영화인들이 여러 배우들의 면면을 보고 캐스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생각이 반영됐다. 황정민은 이 행사를 통해 얼마나 많이 캐스팅 될 것으로 기대하냐는 취지의 질문에 앞의 말로 응답했다. 황정민을 자주 봤던 한 영화인은 “황정민답다”고 말했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인질’을 보면서 15년 전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인질’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유명 배우 황정민의 초반 모습이 실제 황정민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이다.
인터뷰 자리 이외에도 스치듯 여러 차례 만났던 황정민은 직선형이었다. 스타라고 마냥 자신을 친절한 척, 고상한 척,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 조금은 예민하고 살갑지 않은 성격이라 불친절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은근히 속정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인질’ 속 황정민 역시 그렇다. 그는 영화 초반부 납치범들이 사진을 함께 찍자는 둥 귀찮게 하자 처음엔 못마땅한 듯 응하다가 버럭 화를 낸다(결국엔 전기충격기로 제압당해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지만). 편의점 직원과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은 그의 스크린 밖 서민적 풍모를 연상케 한다.
배우가 자신을 연기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관객에게도 조금은 혼란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황정민은 자신의 면모를 보여주면서도 황정민 아닌 황정민을 연기해야 하는데, 그 경계를 어디쯤에서 가를지 고민됐을 듯하다. 관객은 어디까지가 실제 황정민의 모습이며 어떤 면이 실상과 다른 면모인지 구별하려 하게 된다. 황정민을 한번쯤이라도 마주친 사람이라면 실제와 허구의 경계선을 오가는 ‘인질’ 속 황정민에게서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끼게 된다. ‘인질’의 묘미다.
황정민이 처음 눈에 들어온 영화는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다. 그는 밴드 생활을 하다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낙향해 버스 운전대를 잡게 된 강수라는 인물을 연기했다. 옛 동료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운전대에 얼굴을 박고 커다란 어깨를 들썩이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순박한 열정을 저리 잘 그려내는 배우의 정체가 궁금했다. ‘바람난 가족’(2002)에서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변호사 주영작(황정민)을 봤을 때는 누군가 싶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바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황정민은 재능에만 의존하는 배우는 아니다. 자신이 맡게 된 역할을 위해 취재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로드무비’(2002) 출연을 준비하면서 1주일 동안 노숙자 생활을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베테랑’(2016)에 출연했을 때는 서울 명동 8차선을 막고 촬영하는 장면을 위해 관할 남대문경찰서를 직접 찾아 허가를 받기도 했다.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내시는 모습을 보며 끊임없이 연구하는 치열한 배우구나 생각했어요. 얼굴은 무섭게 생기셨지만 촬영장 밖에선 편안한 동네 형 같은 분입니다.” ‘인질’에서 연기 호흡을 함께 맞춘 김재범의 평가다.
지인들이 간혹 “송강호가 연기를 더 잘하냐, 황정민이 더 잘하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배우마다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고, 영화마다 각기 다른 연기력을 보여주니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연기를 해 본 경험이 없기도 하니 쉽사리 답변하기 조심스럽기도 하다. 아마 영화 팬 대부분이 마찬가지리라. 저 질문에 이름이 포함된 것만으로도 황정민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재일동포 배우 김인우는 2016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주저하지 않고 황정민을 꼽았다. “엇비슷한 역할을 맡아도 매번 섬세한 차이를 드러낸다”며 “관객은 잘 알아채지 못할 부분이지만 배우로서 매번 놀란다”는 이유에서였다. ‘인질’은 내게 황정민의 세밀한 연기력을 새삼 깨닫게 해 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