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거기서 나와?" 재미에 눌린 '정치 예능' 그 위험한 동거

입력
2021.09.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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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엄숙주의' 타파, 거리감 좁히는 긍정적 요소
이미지 정치 남발, 일방적 의혹 해명 창구 우려도

"형수님에게도 요리를 해주세요?" "해야 안 쫓겨나고 살지 않겠나."

특유의 너스레를 떨며, 계란말이를 가지런히 접시에 담고 불고기를 휘젓는 모습이 열심입니다. 본인보다 한참 어린 출연자들에게 "그냥 형이라고 해"라며 친근함을 과시하기도 하죠. 중년 배우 성대모사를 흉내 내며 개인기까지 준비한 이 사람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입니다.

SBS 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 제작진이 공개한 '대선주자 특집' 1탄 윤석열 전 총장 예고편 영상의 한 장면인데요. 각 분야의 '사부'들이 출연해 멤버들에게 인생 과외를 해준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죠.

이번에 어렵게 모셨다는 '사부'들은 유력 대권 후보입니다. 제작진은 여론조사를 참고해 지지율이 높은 세 명, 윤석열 전 총장, 이재명 경기지사,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19일, 26일, 다음 달 3일 등 방송 날짜 순)를 섭외했다고 밝혔죠.


첫 주자인 윤 전 총장의 경우 자택에서 촬영을 했고 아내 김건희씨는 출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고편 영상에는 윤 전 총장이 요리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 이외에도 "대통령만 보면 싸우고 싶은가?" "나에게 추미애란" 등 나름의 날카로운 질문들이 오가는 장면이 엿보입니다. 이에 윤 전 총장은 "나를 공격해주면 꼭 지지율이 올라간다" "내 운동장으로 끌고 와서 붙어야지" 등 거침없는 답변으로 웃음 포인트를 쌓았는데요.

최근 윤석열 검찰의 고발 사주 의혹으로 곤혹스러운 처지인 윤 전 총장과 캠프 모두 방송에 거는 기대가 남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인간미를 어필하든, 미래 포부를 역설하든, 추석 연휴를 앞두고 윤석열이란 이름 세 글자를 국민 뇌리에 한 번 더 각인시킬 기회가 생겼으니까요. 유권자 입장에서도 멀게만 느껴졌던 정치인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고, 선거 이슈를 밥상머리 화제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 예능을 반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웃음으로 가득 찬 예고편 영상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보여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로 힘든 현실에선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래. 그렇다고 쌓여 있는 현안에 대한 후보의 속 시원한 답변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여서죠. 재미로 포장된 정치의 '효용성'에 의문이 드는 이유입니다.

듣고 싶은 말보다, 하고 싶은 말이 앞서고, 검증과 비전은 재미와 유머에 밀리는 정치 예능. 인지도와 시청률 상승에 목마른 후보와 방송국에는 서로 윈윈이지만, 국민에겐 어떤 실익이 있을까요. 가볍게 웃어 넘겨 버리기엔 불편하고, 위험한 정치 예능의 변천사를 들여다봤습니다.


'탈권위' DJ가 시작한 정치예능, 최대수혜자는 안철수(?)

정치 예능의 붐을 이끌었던 시초는 정치인의 꾸밈없는 일상과 인생사를 풀어내는 인물 중심의 토크쇼 형태였습니다.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다는 점이 정치 예능의 매력이었죠.

국내 정치인 중 예능 출연의 첫 테이프를 끊은 사람으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을 수 있는데요. 1996년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제작진이 '이경규가 간다' 코너를 진행하며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의 경기 고양시 일산 자택을 갑자기 찾아가면서 방송이 성사됐었죠.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어렵고 근엄하게 받아들여졌던 김 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서태지를 언급하고, 고(故) 이희호 여사와 공원을 산책하며 특유의 입담과 재치를 선보이는 모습에 당시 시청률이 40%가 넘었을 정도로 화제가 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 전 대통령은 소탈하면서도 탈권위적인 정치인이란 평가를 덤으로 얻게 됐죠.


노래 부르고 격파하고 문재인 박근혜도 거쳐갔던 예능

예능 출연으로 대박이 난 대표 사례는 아마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일 겁니다. 2009년 정치와는 전혀 무관하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시절 MBC 황금어장의 '무릎팍 도사' 코너에 출연해, 대중적 인지도를 단숨에 끌어올리며 '안철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죠. 이후 젊은 층이 청년 멘토 이미지를 이유로 전폭적으로 지지를 보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하기까지 했으니, 예능이 배출한 정치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죠.

이후 2012년 18대 대선부터는 대선 후보들의 예능 출연이 본격화했습니다. SBS '힐링캠프'에는 여야 유력 주자들이 앞다퉈 출연했는데요.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지냈던 박근혜 당시 후보는 중학교 시절 비키니 수영복 입은 사진을 공개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특전사 시절 사진을 공유하며, 격파 시범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각각 친근하고 소탈하거나, 강하고 믿음직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치 예능을 적극 활용했던 거죠.


이미지 정치 부추겨 정책 검증 소홀... '정치 희화화' 우려

정치와 대중의 거리를 한 뼘 좁혀주는 데에 기여한, 정치 예능. 그러나 한계도 분명합니다. 이미지 정치를 부추겨 정책 검증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는 그중 하나죠.

이 같은 문제를 피해가고자, 2017년 대선을 앞두고는 후보 검증과 예능을 접목시킨 프로그램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SBS가 선보인 '대선주자 국민면접'과 모바일 예능 '양세형의 숏터뷰' 등이 대표적이었는데요. 민감하고 꺼리는 질문들을 과감히 던지는 압박 인터뷰 형식을 취했었죠.

하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치인 딸의 사윗감 관련 질문이나 전직 대통령 호감도를 비교한 이상형 월드컵 등 재미 요소에 치중하다 보니 정작 필요한 검증은 소홀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죠. 검증을 한다고 해도 공방이 이어질수 없는 구조다 보니, 일방적인 해명을 들어주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가버린 것도 문제였고요. 결국 정치를 감성화, 희화화시켰다는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리얼 관찰 예능? 의혹 해명해주는 잘 짜인 '각본 예능'

최근엔 정치 예능에서도 '관찰 예능' 포맷이 각광받으면서 부작용이 더 커지는 모습인데요. 시사 토크쇼와 달리 관찰 예능은 정책에 대한 논의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죠. 사생활을 드러내며 오직 정치인 개인의 매력에 치중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고 하지만, 각본 없는 방송은 없기 마련이죠. 문제는 대중이 '진짜'라고 믿게끔 착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4월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를 3개월 앞두고 TV조선 '아내의 맛'에 출연했던 나경원 국민의힘 예비후보의 방송은 미디어 비평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관찰예능의 함정을 보여준 사례로 꼽힙니다. 이 프로그램엔 당시 더불어민주당에서 유력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던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출연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선거 시기를 코앞에 둔 출연이라는 점에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특히 나경원 전 의원의 경우 자신을 둘러싼 여러 의혹과 부정적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해명해주는 듯한 장면이 많아 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죠.

해당 방송에는 나경원 전 의원뿐 아니라, 남편과 딸 등 가족의 모습도 등장하는데요. 입시 비리 의혹이 제기됐던 딸 유나씨가 따낸 자격증을 강조하거나, 원정 출산 의혹이 불거졌던 아들의 군 입대 소식을 전하거나, '1억 원 피부과' 논란을 의식한 듯 화장품을 아껴 쓰는 나 전 의원의 모습이 불편하게 다가왔다는 의견이 많았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같은 장면들은 나 전 의원을 둘러싼 부정적 이미지를 상쇄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정치권에서 나왔습니다. 진상 규명을 시도하기 보다는, 물 흘러 가듯 자연스러운 대화와 일상 속에서 여러 의혹들은 대중의 기억 속에 희석됐을 테니까요.


정치와 예능 두 마리 토끼 다 잡지 못하면 외면당할 수밖에

정치 예능을 법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전문가들은 정치 예능 자체의 순기능을 살리되, 역기능을 제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합니다. 예능의 틀을 유지하지만, 재미만 추구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가령 검증에 방점을 찍었다면, 전문 분야의 패널을 배치해 토론 프로그램에 준하는 사전 준비로 압박 면접을 실시하든지, 정치인의 발언 내용을 일방적으로 들려줄 것이 아니라 팩트체크에 나서면서 정치 이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돼야 한다는 제언입니다.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예능과 정치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동거를 노렸다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인들 역시 예능 출연 한 번으로 대중의 눈도장을 찍어보겠다는 얄팍한 마음가짐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을 것입니다. 유머나 입담은 분명 인간적 매력을 더해주는 요소지만, 웃기고 말 잘하는 것만이 대통령의 자질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정치 예능에서 아무리 빵빵 터뜨린다고 해도, 국민의 삶에 웃음꽃을 피우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능만 남고 정치는 없는, 실속 없는 정치 예능에 국민은 더는 웃어주지도, 속아주지도 않을 겁니다.

강윤주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