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앙투아네트처럼" 유진 "극한 연기 고통"

입력
2021.09.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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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펜트하우스' 광기 연기 두 주역

"끝까지 막장이었는데, 가장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본 황당함"(na_b***).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 시청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시즌3 종방(10일) 소감이다. 전대미문의 막장 전개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 관심은 540일 동안 뜨거웠다. 시청률은 한때 29%(3월·시즌2)까지 치솟았다. 배우들의 값진 연기가 화제의 땔감이었다. 김소연(41)은 천서진을 맡아 '악역 종결자'로 거듭났고, 유진(40)은 오윤희 역으로 모성의 명과 암을 극단적으로 보여줬다. 지난해 10월부터 '펜트하우스'를 이끈 두 배우를 종방 직전 각각 화상으로 만났다.


'이브의 모든 것' 이후 20년 만에 다시 악역 맡은 이유

'펜트하우스' 마지막 회에서 천서진은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감옥에서 거울을 보며 단발로 싹둑 자른다. 후두암에 걸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는 상황이었다. 가발을 쓰고 한 연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9일 화상으로 만난 김소연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3년 후 귀휴를 받아 잠시 출소하는 내용의 대본을 받고 '천서진을 가발을 쓴 채 보내도 될까'란 묘한 감정이 들더라"며 "일주일 동안 고민하다 가발 쓰고 찍자는 감독님께 직접 내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해 찍은 장면"이라고 말했다. 밖에 나와 멀리서 딸을 지켜보며 생을 마감한 천서진의 머리는 곳곳이 하얗게 셋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당하기 직전 머리가 백발로 변했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그래서 흰머리 분장을 해달라고 먼저 부탁했죠." 김소연은 천서진에 '진심'이었다.

극중 천서진은 재단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사지로 몰고, 걸림돌이 된다며 친구도 절벽에서 밀어 버린다. 김소연은 남다른 광기로 패륜의 악역을 변주했다. 살인 증거를 없애기 위해 휴대폰 유심칩을 씹어 먹는 모습과 피범벅이 된 손으로 집에 들어와 눈을 희번덕거리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 '핏빛 연주'로 극의 공포가 굴러갔다. 김소연은 "내 딸을 구해준 윤희(유진)를 절벽에서 미는 대본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며 "'천서진에 너무 이입하지 말자'고 했는데 스트레스로 입에 혓바늘이 돋고 악몽도 꿨다"고 촬영 뒷얘기를 들려줬다. 유심칩을 씹어 먹는 장면은 마임 연기였다고 한다. 김소연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많아 작가님이 생강 원액을 선물로 주셨다"며 "찢어지는 소리가 나 소리 지르는 연기가 콤플렉스였는데, 이번에 조금 극복한 거 같다"며 웃었다.

김소연은 1994년 청소년 드라마 '공룡선생'으로 데뷔했다. 1997년 영화 '체인지'에서 천재지변으로 성별이 바뀌어 남성으로 변한 뒤 껄렁한 연기로 웃음을 주기도 했다. 그가 배우로 이름을 널리 알린 건 2000년 장동건, 채림과 함께 출연한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을 통해서였다. 당시 김소연은 성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아나운서 역을 강렬하게 소화했다. 날카로운 이미지를 벗기 위해 한동안 악역을 고사했던 김소연은 20년 만에 다시 악역을 맡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김소연은 "'펜트하우스' 시놉시스를 받고 출연을 고민했는데, 상우 오빠(남편)가 '도전해 봐'라고 한 말에 그간 내가 너무 안주하려 한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며 "예전에 '왕좌의 게임'을 보며 시즌을 거듭하며 성장하는 배우들을 보며 꿈꿨던 연기 욕심도 떠오르고, 그 희열에 촬영하면서 울컥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카메라 밖에서 김소연은 '순둥이'로 유명하다. "정말 잘해보겠습니다!" 올해 27년차 배우는 두 손을 꼭 잡고 해맑은 목소리로 인터뷰에 의지를 불태웠다. 극중 재산 상위 1%만 입주할 수 있는 헤라팰리스 펜트하우스의 주인이었던 배우의 다음 일정은 "멍 때리며 만화 보기"란다. "아, 이제 피아노는 보기도 싫어요, 하하하."


"처음엔 고사했지만" 원조 아이돌의 첫 악역

딸의 명문 예고 입시를 위해 남의 자식을 죽였다. 유진은 '펜트하우스'에서 비뚤어진 모성으로 비극을 빚는다. 누군가의 삶을 낭떠러지로 몰아넣고 들어간 학교에서 그의 딸은 예술제 대상 수상을 앞두고 지옥의 문을 밟는다. 7일 화상으로 만난 유진은 "헤라팰리스에서 설아(조수민)를 밀어 죽였다는 시실을 대본으로 뒤늦게 알고 처음엔 납득이 어려웠고, 작가님과 많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이해하려 노력했다"며 "실제로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죽음을 앞둔 자식을 바라보는 극한의 연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학교 계단에서 피를 흘린 채 의식을 잃은 딸을 안고 통곡하는 유진의 연기는 '펜트하우스'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유진은 신스틸러였다. 시즌1에선 헬기를 타고 주단태(엄기준)와 천서진의 약혼식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시즌2에선 성대결절로 고음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천서진의 섀도 싱어(무대 뒤에서 대신 노래 부르는 사람)로 나서 극에 긴장감을 더했다. 유진은 "헬기 장면을 찍을 때 워낙 바람이 세 모든 소품이 날아가 아수라장에서 연기했다"며 "섀도 싱어로 노래 부를 때 립싱크하면 티가 날 거 같아 진짜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촬영했다"고 웃었다.

유진은 1997년 그룹 S.E.S. 멤버로 데뷔했다. K팝 1세대 아이돌로 큰 인기를 누린 그는 2002년 드라마 '러빙유'에 출연하며 배우로 새 길을 갔다. 이후 미혼모('원더풀 라이프'·2005)와 억척 며느리('백년의 유산'·2013) 역을 잇따라 소화하며 배우로 입지를 다졌다. 동료 배우 기태영과 결혼 그리고 두 딸 출산. 이런 순간들이 단층처럼 쌓이면서 올해 20년차 배우 유진의 연기에도 자연스럽게 '살'이 붙었다. "진짜 엄마가 되고 보니 감정 이입이 아무래도 편해진 게 아닐까 싶어요. '펜트하우스'는 도전의 의미가 컸어요. 처음엔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아 고사했거든요."

무대 위 요정이었던 유진은 이제 일하는 엄마다. 그는 남편과 동시에 작품 촬영에 들어가지 않는다. 육아를 서로 나눠 하기 위해서다.

"같이 일을 하면 두 아이를 볼 사람이 없으니까요. 한 명이 일에 들어가면 되도록 다른 한 명은 작품을 하지 않기로 얘기를 했어요. 아이들에게 중요한 시기고, 엄마든 아빠든 한 명은 같이 있어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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