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정은 연설·전략무기 빠진 '작은 열병식'... "민심 달래고, 美 압박하고"

입력
2021.09.09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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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수립 73주년 열병식, '비정규군' 중심 
체제 이완 단속 및 대미 압박 '이중 노림수'


언뜻 보면 ‘초라한’ 행사였다. 북한이 9일 정권수립 기념일(9ㆍ9절) 73주년을 맞아 개최한 열병식에는 최고지도자 김정은 국무위원장 겸 노동당 총비서의 육성 연설도 없었고, 한반도 정세를 일거에 얼어붙게 만들 새로운 전략무기도 등장하지 않았다. 수만 명 군중 앞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내보이며 보란듯이 군사력을 과시하던 과거 열병식과는 확실히 달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경제난으로 고통받는 주민들을 다독이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체제의 안정을 드러내야 하는, 북한 지도부의 ‘딜레마’가 이번 열병식에 투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열병식 주인공은 軍 아닌 '인민'...위상·규모 대폭↓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9일 “공화국 창건 73돌 경축 민간 및 안전무력 열병식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히 거행됐다”며 “9일 0시 환영곡이 울리는 가운데 김정은 동지께서 열병광장 주석단에 나오셨다”고 보도했다.

김 위원장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연단에 서서 행사를 지켜만 봤을 뿐, 북한 주민과 국제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대신 선전선동을 맡은 당 중앙위원회 리일환 비서가 연단에 올랐다. 리 비서는 “우리는 일심단결의 위력으로 현 난국을 타개하고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고조기, 격변기를 열어나갈 것”이라며 자력갱생을 통한 위기 돌파를 강조했다. 대외 메시지 발신에 주력했던 그간의 열병식과 달리 내부 결속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실제 행사 내용도 철저히 ‘인민’에 초점을 맞췄다. 사열도 군 출신이 아닌 조용원 당 조직비서가 주관했고, 한국군의 예비군에 해당하는 노농적위군과 경찰 격인 사회안전군이 중심이 됐다. 평소에는 농촌과 공장에서 생업에 종사하던 이들이다. 또 코로나19 방역을 담당하는 비상방역종대와 보건성 종대, 학생군사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도 모습을 보였다.

‘비정규군’ 위주의 열병식은 동원 무기들에서도 큰 차이가 났다. 전략1기를 실은 군사용 트럭 대신 오토바이와 트랙터가 식장을 누볐고, 122㎜ 다연장 로켓과 불새 대전차 미사일, 견착식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등 ‘재래식 무기’가 주를 이뤘다. 지난해 10월 당 창건일과 올해 1월 8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 당시 ICBM 개량형인 ‘화성-16형’과 SLBM을 개량한 ‘북극성-4형’, ‘북극성-5형’ 등 최신 전략 무기체계를 선보이며 서울과 워싱턴을 위협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청중 규모 역시 대폭 줄었다. 대북 전문가들에 따르면 정예 병력이 나오는 열병식은 통상 2만 명 넘게 운집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번 열병식 참관 인원은 7,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안팎 다 챙겨야 하는 김정은의 '딜레마'

북한의 ‘쪼그라든’ 열병식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정규군과 신무기가 대거 등장하는 열병식은 적어도 2개월 이상의 준비 기간과 엄청난 자금이 투입된다. 하지만 올해 9ㆍ9절 행사는 2일 미림비행장에서 예행연습 장면이 포착된 뒤 열흘도 안 돼 열렸다. 북한 수뇌부가 중시하는 정주년(5ㆍ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이 아닌데도 급조해 개최한 기색이 역력하다.

열병식의 위상을 낮추면서까지 행사를 강행한 이유는 북한의 열악한 내부 사정과 맞닿아 있다. 키워드는 ‘청년’과 ‘초조함’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 출범 후에도 꿈쩍도 않은 미국의 제재와 코로나19에 따른 국경봉쇄로 북한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당연히 민심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시장경제에 익숙한 ‘장마당 세대’가 주류로 떠오르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사상적 이완이 이뤄지는 정황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북한이 이달 말 최고인민회의에서 사상 단속이 골자인 ‘청년교양보장법’을 채택하기로 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북한이 지난달 한미연합군사연습(한미훈련)에 반발해 무력 시위를 시사했으면서도 ‘대내용’ 열병식에 그친 것은 일단 무리하게 이벤트를 개최해서라도 내부 사기를 끌어올려야 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육성 연설을 생략한 것 역시 ‘희망’을 말하기에는 상황이 계속 나빠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해 10월 당 창건 기념 열병식 연설에서 “미안하다. 고맙다”를 반복하며 민심을 다독였지만, 이후에도 가시적 성과는 전무하다 보니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는 풀이다.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는 “인민들에게 비전과 보상이 아닌, 또다시 희생과 헌신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반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예전처럼 미국을 의식해 열병식을 진행한 목적도 있다. 3회 연속 관행처럼 굳어진 ‘심야 열병식’이 단적인 근거다. 남북 통신연결선 복원 및 재단절→한미훈련 문제 제기→열병식 개최까지, 최근 일련의 흐름을 보면 북한은 일관되게 미국을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새로운 핵ㆍ미사일 등 대량살상 무기를 공개하지 않아 바이든 행정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체제의 건재를 과시하는 ‘작은 열병식’을 통해 향후 압박의 강도를 높일 여지를 남긴 셈이다. 양무진 북한 대학원대 교수는 “핵무력도 없고 연설 내용도 한미를 자극하지 않는 ‘로키 전략’”이라며 “안정적 한반도 정세 관리를 위해 운신의 폭을 열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김민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