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면 무주택자 반발, 놔두면 가계빚 뇌관… 전세대출 딜레마

입력
2021.09.0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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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셋값 상승·영끌 투자에 전세대출 급증
전세대출 줄이면 무주택자 피해 가능성
갭투자·고가 전세만 '핀셋 규제' 전망

정부가 최근 급증하는 전세대출을 놓고 '규제 딜레마'에 빠졌다. 전세대출을 그대로 두자니 치솟는 가계부채를 제어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돈줄을 죄자니 무주택자 등 실수요자의 주거 안전성을 헤칠 수 있어서다.

정부가 폭증하는 가계대출 증가세를 잡겠다고 공언한 만큼, 결국 전세대출에도 규제 칼날을 댈 가능성이 높은데, 시장은 전방위적 규제보다 갭투자(전세를 낀 주택 매입)나 고가 전세 등에 대한 '핀셋 규제'에 나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가계대출 4% 늘어난 사이, 14% 뛴 전세대출

8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기준 지난달 말 가계대출은 698조8,149억 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4.28%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세대출은 14.02% 뛴 119조9,670억 원으로 집계됐다. 증가폭 자체로는 전세대출이 가계대출보다 3배 이상 가파르다.

전세대출이 크게 늘어난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전셋값 상승에 따라 세입자가 빌리는 전세대출 규모 자체가 자연스럽게 커졌다. 전세 가격은 지난해 7월 임대차 3법 시행 이후 공급이 줄면서 급등했다.

금융권, 세입자 측면에서도 전세대출은 매력적이다. 금융권은 돈 떼일 위험이 적은 전세대출을 다른 상품보다 쉽게 내주고 있다. 계약 종료 후 보증금을 돌려받는 전세 구조상 대출금 회수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세입자가 빚 갚을 능력이 없다면 전세대출을 90% 수준으로 보증하는 한국주택금융공사, 주택도시보증공사, 주택금융공사 등이 대신 갚아주기도 한다.

세입자는 대출 금리가 가장 낮은 전세대출을 최대한 당겨 썼다. 여윳돈이 있더라도 전세대출을 이용해 주식 등에 투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집을 산 후 세입자가 준 전셋값으로 집 구매 비용을 메우고 자신은 전세대출을 활용해 다른 전세를 구하는 갭투자도 성행했다.

전세대출이 규제 무풍지대인 영향도 있다. 금융위원회는 전세대출이 무주택자가 주로 찾다 보니 아주 약한 규제만 적용하고 있다. 전세대출을 이용할 수 없는 대상은 다주택자나 시가 9억 원 초과 1주택자, 투기지역·투기과열지구 내 3억 원 초과 아파트 보유자뿐이다.

"강남 전세, 서민 전세와 구분해 규제해야"

금융위는 이런 전세대출 규제를 두고 '진퇴양난'이다. 당장 가을 이사철을 앞두고 전세대출을 조였다가 무주택자로부터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정부로선 임대차 3법으로 전세 가격을 올려놓고 대출 한도는 줄여 세입자가 '살 만한 집'도 구하지 못하게 한다는 지적이 가장 뼈아프다.

그렇다고 전세대출을 방치하기엔 증가세가 너무 가파르다. 아직 은행권 가계부채 증가율은 정부가 제시한 연간 목표치 5~6%를 밑돈다. 하지만 전세대출이 연말까지 현재 속도대로 계속 불어난다면 전체 가계부채도 연간 관리 목표를 웃돌 수 있다.

이에 따라 서민 세입자와 고소득 세입자를 구분해 규제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온다. 관련 대책으론 전세대출 불허 대상을 모든 1주택자로 넓히는 방안이 거론된다. 전세대출을 받는 1주택자는 갭투자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서다. 전셋값에 따라 전세대출 보증 수준을 차등화하는 방법도 제시된다. 이 경우 금융권은 고가 전세 주택일수록 대출 위험을 감수해야 해 심사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모든 전세 세입자는 실수요자, 약자라는 인식 아래 강하게 보호받고 있다"며 "강남 전세 아파트를 사는 이들까지 서민 세입자와 같은 수준의 보호를 받는 건 의문"이라고 말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전세대출 규제는 실무진 선에서 다양한 가계부채 대책 가운데 하나로 검토 중이고 아직 더 높은 의사 결정 기구에서 논의되진 않았다"며 "전세대출은 무주택자와 연결돼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고 현재 금융권 총량 규제만으로도 줄어드는 효과가 있어 조금 더 지켜볼 것"이라고 했다.

박경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