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11일까지 열리는 ‘이서전: 지구라도 옮길 기세’다. 전시가 기획될 때 참가자들의 열기가 뜨거운 것을 보고 누군가가 “지구라도 옮길 기세”라고 말한 데서 전시 제목이 결정됐다.
163명은 다름 아닌 이화여대 서양화과 졸업생들. 이들은 국내 대학 최초로 생긴 미술 전공 학과를 졸업한 이들이다. 이대 서양화과 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미술평론가 조은정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는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최초의 졸업생들이 생존하며 그들이 그들의 미술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며 이 전시가 단순히 ‘동문전’의 형태만 띠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실제 전시에선 초기 졸업생들의 구술 영상을 볼 수 있다. 1949년에 졸업한 1회 졸업생 신금례(95) 화백은 영상에서 미술 재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기름이 없어 참기름을 쓴 사연, 누드화를 그리고 싶었는데 모델을 구할 수 없어 동료들끼리 속옷을 입은 채로 모델을 선 이야기 등을 들려줬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홍익대 조형대 교수를 지낸 신금례 화백의 작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신 화백은 평소 자주 소재로 다뤘던 엉겅퀴를 그린 ‘봄’을 선보였다. 신 화백은 “가시가 핀 꽃으로 저항적인 느낌이 있다. 꽃 자체가 변화무쌍하기에 그릴 맛이 난다”고 설명했다. 신 화백의 그림 맞은편에는 올해 졸업한 학생의 작품도 걸려 있다. 신씨의 손녀뻘보다도 더 어린 이용미씨는 디지털 이미지를 피그먼트 프린트로 표현한 ‘파편들’을 선보였다.
모녀의 작품이 한 공간에 걸려 있기도 하다. 수차례 모녀전을 해왔던 이경순(93) 화백과 조기주(66) 화백(단국대 서양화과 교수)이 그 주인공이다. 이 화백과 조 화백은 같은 학교 같은 학과를 각각 1950년과 1979년에 졸업했다.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서양화 부문 유일한 여성 초대작가 출신인 이경순 화백은 ‘창가의 도라지꽃’을 선보였고, 그의 딸 조기주 화백은 시멘트 등을 활용한 추상화를 내걸었다. 조 화백은 “엄마와 그림은 서로 다르지만,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기질은 닮았다”며 그림 앞에서 웃었다.
이 밖에도 중견 작가, 신진 작가 등 개성 넘치는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조은정 교수는 “작업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잠을 줄이고, 나쁜 엄마가 되기도 하는 여성 미술가의 삶은 일반인은 상상하기 어렵다”며 “화가로서 자신을 연마하는 경우이거나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조차 갖지 못한 모두에게 작가로서 함께하는 이들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소중한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49년 처음 열린 이서전은 1~2년에 한 번씩 열려 올해로 47회를 맞았다.